지금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제19차 당사국총회(COP19)가 열리고 있다. 개막일인 지난 11일, 까무잡잡한 피부에 안경을 낀 남성이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사흘전 슈퍼태풍 하이옌이 덮친 고국의 처참한 상황을 언급하는 나데레브 사노 필리핀 대표단 단장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로 목이 메이는지 간간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바르샤바 회의장에서 지구온난화를 막기위한 획기적인 합의를 촉구하며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외신사진을 보니, "지금은 점심시간이지만 우리는 먹지 않는다"" 필리핀과 함께 하라""2012 보파 1067/2013 하이옌 10000+"라고 쓴 팻말을 들고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표정이 하나같이비장하다. 지난해 12월 태풍 보파로 1067명이 사망했던 필리핀에서는 1년도 채 안돼 하이옌으로 1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바다제비(하이옌·海燕)'는 광폭했다. 필리핀을 덮치고 물러난지 7일이나 지난 현재까지도 사진과 영상으로 전해지는 현지 상황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성한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완전히 파괴된 마을,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가 돼 거리를 헤매는 어린아이들, 해안가로 밀려올라온 폐선박,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에 2004년 인도양 쓰나미,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의 참상이 겹쳐진다. 13일에는 최악의 피해지역인 타클로반에서 굶주린 이재민 수천명이 정부 식량창고를 습격해 약탈하려다가 벽이 무너지면서 8명이 압사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하이옌과 같은 거대한 자연현상 앞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미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재해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기후변화의 빈부경제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슈퍼태풍의 연관성은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가난한 국가, 또는 잘사는 국가 속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후변화가 더 혹독하다는 사실은 이미 통계로 증명됐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의 뉴올리언스를 기억해보자. 워낙 강력한 허리케인이기도 했지만, 뉴올리언스의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환경적으로 위험한 저지대 변두리에 가난한 주민들이 몰려살면서 인명피해가 더 커졌던게 사실이다.
2008년 미얀마 나르기스도 비슷하다. 나르기스는 하이옌에 비하면 위력이 훨씬 낮은 태풍이었지만 무려 14만명의 사망자를 초래했다. 오랜 군부독재와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해 경제상태가 열악했던만큼 자연재해에 대한 예방조치가 거의 없었던 탓이다. 필리핀 경우에도 허술하게 지은 가옥과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인명피해가 더 커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올해 초 ,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 빈곤감축과 기후변화는 서로 연결돼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애써 이룩해놓은 발전이 수십년 뒤로 후퇴하고, 빈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천만명씩 늘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필리핀의 비극을 보면서, 기후변화의 잔인한 불평등을 새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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