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이탈리아 로마 법정에 콧수염을 기른 중후한 풍채의 남성이 들어섰다. 피고인 석에 선 남성의 이름은 크리스티앙 파리소. 목이 긴 초상화로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에 관한 세계 최고 권위자이자, 모딜리아니가 남긴 각종 자료 6000여점을 관리하는 '모딜리아니 아카이브 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검사는 파리소가 최소 22점의 모딜리아니 작품을 위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파리소가 위작임을 알면서도 진본으로 감정했다는 것이다. 현지언론 일 템포의 보도에 따르면, 파리소는 첫날 재판에서 모든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472억원에 낙찰된 모딜리아니의 1919년작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크리스티앙 파리소>
전 세계 미술계의 시선이 지금 로마의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기의 위작 재판'에 쏠리고 있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며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문가가 위작을 양산해온 '사기꾼'으로 재판정에 섰기 때문이다.
이 재판에 쏠린 관심의 뿌리는 결국 '돈'이다. 지난해 2월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1919년 작 '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이 2690만 파운드(약 472억 원)에 팔렸다. 잔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연인으로, 그가 사망한 이튿날 만삭의 몸으로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둘 사이에는 딸 잔(1919∼1984)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지난 2012년 12월, 한 수집가가 소장한 867만 8800만 달러짜리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위작으로 드러나 미술계를 경악시켰다. 거장의 명화가 한 순간에 쓰레기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따라서, 파리소의 위작 혐의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미술계에 몰고 올 파장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떨면서 이번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이유다.
사실 모딜리아니는 위작이 많기로 악명 높다. 스타일이 일관된데다가, 서명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위작품을 만들어내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의 저명한 미술품 거래상인 데이비드 내쉬는 최근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모딜리아니는 작품 기록을 매우 잘 정리해놓은 피카소, 브라크와 너무 다르다"라고 말했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사망한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작품을 주변친지들에게 마구 나눠주거나 생필품을 사기 위해 싼 값에 팔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시중에 약 1000점의 모딜리아니 위작이 나돌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지어 "모딜리아니는 살았을 때보다 죽은 다음에 그림을 더 많이 그린 것같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이다.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파리소는 지난 1982년 모딜리아니의 유일한 딸인 잔으로부터 모딜리아니가 남긴 사진, 편지, 일기 등을 인수받아 '공식 관리자'가 되면서 이 분야 최고 권위자로 우뚝 섰다. 그는 이 기록물을 토대로 '모딜리아니 아카이브 재단'을 만들었고, 모딜리아니 전작 도록을 편찬했다. 한 작가의 전작 도록은 진위판정 및 거래에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파리소는 전 세계에서 크고 작은 모딜리아니 전시회를 개최해 돈과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다. 특히 또다른 모딜리아니 권위자인 프랑스 평론가 마르크 레스텔리니와는 앙숙관계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서로 소송전을 벌인 적도 있다.
파리소가 이른바 '위작 시비'에 휘말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2년 잔 에뷔테른의 증조카가 파리소를 상대로 모딜리아니 드로잉 위조 소송을 제기했고, 2006년에는 파리 경찰이 파리소 사무실을 급습해 의심스런 작품들을 압수한 적도 있다. 2008년 파리 법원은 2년에 걸친 심리 끝에 파리소에게 2년 실형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번 로마 재판은 지난 2010년 경찰이 파리소가 기획한 모딜리아니 전시회를 중단시키고 위조품으로 의심되는 22점을 압수한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파리소는 체포됐다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문제는 이번 재판으로 과연 모딜리아니 작품을 둘러싼 의혹들이 말끔히 해소될 것인가 여부이다. 아쉽게도, 전망은 회의적이다. NYT는 모딜리아니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 혼란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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