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를 맞아 인류학자의 주가가 껑충 뛰고 있다. 인류학이라면 으례 아마존 오지의 부족사회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최근들어선 최첨단 정보기술(IT) 기업이 인류학자들의 중요한 일터 중 하나가 되고 있다. IBM,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쟁쟁한 IT기업들이 인류학자들을 대거 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 뿐만 아니다. 경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인문학,사회과학 분야 연구자들을 고용해 고객들의 행태를 파악하고 미래의 사업방향을 모색하는 기업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세계최대 반도체 제조기업인 인텔. 일찍부터 인류학과 사회과학의 가치에 주목해온 인텔은 약 100명의 학자들로 이뤄진 '인텔 랩'을 운영하고 있다. 연구원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기술을 소비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인텔이 반도체 중심 영업방향을 '사람 중심'으로 바꾸면서 랩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구원들이 축적한 관찰자료는 인텔 뿐만 아니라 제휴사, 파트너 회사들에게도 제공된다.
이 랩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호주 출신의 인류학자 쥬느비에브 벨(46) 박사이다. 스탠포드대 인류학과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던 그는 어느날 인텔에서 일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올해로 인텔에서 근무한지 16년 째. IT 분야에 종사하는 인류학자 1호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NYT와 인터뷰에서 " 면접 때 급진페미스트이자 골수 네오 막시스트라고 했는데도 합격시켜주더라"며 "근무 첫날 상사로부터 받은 주문은 딱 두가지 , 여성과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ROW, Rest Of World)'에 대해 연구해달라는 것 뿐이었다"고 말했다.
벨 박사는 인텔 내에서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를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인텔 경영진은 기존의 반도체 사업에만 매달렸고, 그 결과 새로운 시대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금은 벨 박사가 이끄는 랩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입는 컴퓨터'용 반도체, 초소형 퍼스널 로봇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벨 박사는 NYT 인터뷰에서 "새로운 것에 대해 기업이 학교보다 개방적"이라며 "학교에서는 선배 교수들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대놓고 말하기 쉽지않은데 비해 기업인들은'흥미롭다''더 이야기해봐라' 며 오히려 더 관심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의 새로운 트렌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으로 유명해 '디지털 업계의 점쟁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인텔 뿐만 아니라 구글과 MS도 인류학자, 사회학자, 인문학자들을 고용해 사내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IBM는 직원 재교육에 고전문학 강좌를 이용한다.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는 사내에 픽사대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문학, 철학, 글쓰기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유니레버는 글쓰기 워크숍을 운영한다.
덴마크의 장난감 회사 레고는 인류학자들의 컨설팅 덕분에 도산 위기를 극복한 케이스이다. 1949년 목수 키르크 크리스티얀센에 의해 설립된 레고는 조립식 블럭 장난감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 약 10년전 컴퓨터 게임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경영진은 시대 변화에 따른다며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레고는 인류학자들을 직원으로 채용해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곳곳의 가정으로 보내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무엇을 하고 어떻게 노는지 관찰하게 했다. 학자들은 가족 구성원들과 대화와 쇼핑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가 하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놀이에 대한 생각, 욕구 등을 세밀하게 들여다봤다. 그 결과, 레고는 다각화했던 사업 방향을 버리고 전통적인 블럭 장난감에 집중해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으로 재도약을 이뤄냈다.
레고의 '인류학 실험'에 참여했던 크리스티안 마드스베르크, 미켈 라스무센 박사는 최근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출판부를 통해 ' 명료한 순간: 인문과학을 이용해 기업의 어려운 문제 풀기'란 저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이 책을 관심있게 보도하면서, 두 저자가 ReD라는 회사를 세워 인문학과 기업경영을 접목한 컨설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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