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9·11테러였다. 두대의 비행기가 뉴욕 무역센터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들을 낳은 사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전쟁을 발발시켰고, 두 나라에 대한 한국군의 파병으로 이어졌으며, 이제 아프간에서의 한국인 피랍사태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새삼 자각하게 된 것은 먼 나라에서 벌어진 테러사건이 결국에는 우리의 삶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영국, 스페인과 독일이 테러로 고통받고 있을 때, 솔직히 그것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우리도 당사자다. 테러리즘의 국제화 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실감하게 된 셈이다.
남은 21명의 한국인 피랍자 모두 안전하게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지만, 어쨌든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많은 고민과 의미를 남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가장 먼저 뼈아프게 자성하게 되는 점은 분쟁지역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국제화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국제화 시대를 살아갈 자세는 미흡했다는 이야기다. 한국에는 현재 아프간 전문가는 물론이고 현지언어인 파슈토, 다리어 구사가 가능한 인력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격렬한 종교. 정치적 분쟁의 한 가운데 뛰어들어간 피랍자들도 그렇지만, 정부의 행보를 지켜보면서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다산·동의부대 병사들을 파병해놓은 아프간의 복잡한 역사, 정치 관료조직, 언어는 물론이고 주변국들과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과연 정부가 실질적 준비를 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가까운 일본은 2002년 이후 아프간 새 정부 구성을 논의하기 위해 원로회의 개최비용을 부담하는 등 지금까지 무려 12억달러 이상을 지원하며 탄탄한 인맥 및 정보채널을 구축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피랍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철군일정을 거론하고, 탈레반 수감자 석방 및 몸값 지불이란 협상카드를 노출하는가 하면 납치범들과 직접대화를 공개한 일련의 미숙한 정부 행보는 되짚어봐야할 부분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국제사회에서 어떤 국가도 테러범과의 직접협상을 공식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이번 사건은 보기 드문 대규모 피랍이며 장기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너무 많은 패를 노출시킨 결과 향후 엄청난 부담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분쟁지역을 방문하거나 그 곳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이 테러범의 ‘쉬운 타깃’이 될 확률이 높아졌고, 최대 동맹국인 미국과 ‘테러와의 전쟁’ 공조에 있어서도 위축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뿐 아니라 이라크, 레바논 등에 한국 군인들을 파병해놓고도 정작 그 의미와 효과가 퇴색될 수도 있다.
공포에 떨고 있을 피랍자의 처지를 생각하며 마음이 돌덩어리처럼 무겁던 차에, 어제 독자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따가운 비판이 쏟아졌다. 외국땅에서 우리 국민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판에, 언제까지 널뛰듯 헷갈리는 외신보도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냐는 질타였다. 우리 언론의 아프간 현지취재가 현재로선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개운치 않은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언론들이 발빠르게 깊숙한 현지정보를 빼내는 것이나, 뉴스위크가 납치범들과 가진 장문의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넘어서 자괴감마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한국언론에도 많은 숙제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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