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푸틴집권 15년... 이어지는 '정치적 암살사건'들

bluefox61 2015. 3. 6. 11:40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개혁을 부르짖었던 저명한 야권 지도자가 모스크바 거리에서 괴한이 쏜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전 세계는 경악했고, "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총탄에 맞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지난 2월 27일 크렘린궁으로부터 불과 200여m 떨어진 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사망한 블라디미르 넴초프 전 러시아 부총리가 아니다. 2003년 4월,자유러시아당 지도자 공동당수였던 세르게이 유셴코프는 모스크바의 자택 인근 도로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져 사망했다. 그는 하원(두마)보안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한 거물 정치인이었으며, 특히 KGB의 후신인 국가보안부(FSB)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이른바 ‘코발레프 위원회’의 부의장이었다.
 데자뷔. 넴초프 암살 사건을 지켜보는 러시아 국민들이 요즘 가장 많이 떠올리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던’ 이란 의미를 가진 ‘데자뷔’일지도 모른다.사건은 분명 2015년 2월 27일에 일어났는데, 똑같은 사건을 이전에도 목격했던 것과 같은 기시감이 들기 때문이다. 러시아 야당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넴초프의 죽음을 ‘정치적 암살’로 규정하는 이유다.

 

 

 ◆돌아온 암살정치= 러시아에 암살의 공포가 다시 돌아왔다.넴초프의 사망이 야당과 반정부 시민운동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문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15년에 걸친 치세동안 ‘정치적 암살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데다가, 일정한 패턴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유셴코프 사건은 당내 갈등에 따른 살인사건으로 공식 정리됐다.유셴코프와 함께 자유러시아당을 만들었다가 당내 권력에서 밀려난 미하일 코다네프란 인물이 다른 3명과 공모해 경쟁자인 유셴코프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국은 유셴코프와 한때 동료였다가 영국으로 망명한 거부 보리스 베레좁스키가 심복인 코다네프는 내세워 유셴코프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코다네프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강하게 주장했지만, 결국 유죄판결을 받고 현재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러시아에서는 아직도 코다네프가 진범이 아니며,유셴코프가 FSB의 테러조작사건을 추적하다가 제거됐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유셴코프와 함께 코발레프위원회의 핵심 멤버였던 유리 슈첸크치킨은 독극물에 중독돼 사망했고, 또다른 멤버인 미하일 트레파슈킨은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지금도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코발레프 위원회는 물론 공중분해됐다.
 주목받던 정치인들이 이처럼 줄줄이 목숨을 잃거나 수감자 신세가 됐지만,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서방 언론과 러시아 정치 전문가들은 앞서 발생한 야권 정치인, 언론인들의 피살사건이 미궁에 빠졌던 것처럼,넴초프 사건 역시 같은 길을 밟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셴코프>

 

                                               <폴리트콥스카야>

 

                                                  <리트비넨코>

 ◆15년간 정치인·언론인 수십명 의문사 =푸틴 체제 15년동안 괴한의 총탄에 맞거나 독극물에 의해 목숨을 잃은 정치인,언론인, 인권운동가는 수 십명에 달한다. 이중 최대 피해 직업군은 언론인이다. 푸틴이 집권했던 2000년 한 해동안에만 기자 6명이 푸틴을 비롯한 권력층의 비리를 추적,폭로하던 중 살해됐다. 2002년에는 무려 8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6년에는 푸틴 정부의 체첸 정책과 인권탄압을 파헤치던 노바야 가제타 지 기사 안나 폴리트콥스카야가 모스크바 자택 인근에서 총탄에 목숨을 잃었고, 2009년에는 폴리트콥스카야와 같은 신문 기자인 아나스타샤 바부로바가 인권변호사 스타니슬라프 마르켈로프와 모스크바 거리를 걷다가 총탄세례를 받아 함께 사망했다. 2011년에도 3명이 목숨을 잃는 등, 지난 15년간 정부 및 권력층 비리 폭로와 관련해 피살된 언론인이 40여명에 이른다.

 

 


 암살당한 거물급 정치인,인권운동가들도 최소 10명이 넘는다. 2002년 블라디미르 골로플료프 자유러시아당 당수의 피살을 시작으로, 2006년에는 영국으로 망명해 반푸틴 운동가로 변신한 전 FSB요원 알렉산더 리트비넨코가 런던에서 옛 동료들과 차를 마신지 수 주만에 방사성 물질 폴로니엄 중독으로 사망했다. 푸틴의 체첸 정책을 비난하고 러시아군의 인권침해를 폭로하던 인권운동가 나탈리아 에스테미로바는 2009년 딸이 보는 앞에서 괴한들에게 피납된 후 시신으로 발견됐다.2013년 영국으로 망명해 러시아 반정부 운동을 원격지원했던 보리스 베레좁스키의 죽음도 의문투성이다.정황은 자살이지만, 암살의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 암살과 우크라이나 사태 = 이 모든 사건을 푸틴이 직접 지시했는지 여부는 알 수없다. 암살 피해자들이 푸틴 뿐만 아니라 특권층을 비판해왔다는 점에서, 그들을 껄끄럽게 여겨온 사람들이 청부살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경찰은 넴초프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업활동, 여성편력 등으로 인한 갈등설을 흘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크라이나 사태와의 관련성이다. 넴초프는 친서방 우크라이나 정치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반푸틴 운동 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 내에서 민족주의 또는 애국주의가 폭력적인 수준으로  고조돼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크렘린에 대한 비판이 곧 러시아에 대한 비판, 나아가 매국행위로 여겨지는 분위기라는 것이다.푸틴은 지난해 크림반도를 합병하면서 "러시아 내에 제5열 매국노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넴초프 측근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리즈코프는 지난 4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제5열 파괴가 목표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러시아 사회가 점점 더 폭력적이며, 사방에 위험이 존재하는 예측불가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저명한 언론인인 예프게니아 알바프 역시 "제5열을 제거하라는 (푸틴의)요구가 넴초프의 죽음을 촉발했을 수있다"고 말했다.  즉 푸틴이 넴초프의 암살을 직접 명령한 것은 아닐라 할지라도, 넴초프의 죽음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용해 민주화 진영,야권 죽이기에 나선 푸틴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푸틴 대통령은 4일 내무부 고위급 회의에서 "저명인사들을 겨냥한 범죄, 특히 정치적 동기가 있는 범죄에 심각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 최근 우리가 목격한 비극(넴초프 죽음)과  불명예를 이제는 없애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는 넴초프의 죽음을 ‘정치적 동기의 범죄’로 규정하면서도, 그 뒤에 자신이 있다는 세간의 의혹을 일축하는 노련한 말솜씨를 과시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경제위기,잇단 저명 인사들의 의문사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지지율은 86%로,여전히 고공행진 중이다.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암살사건의 주인공은  볼셰비키 혁명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레프 트로츠키이다.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한 후 트로츠키는 노선을 둘러싸고 이오지프 스탈린과 대립하다가, 결국 1927년 당에서 제명당하고 국외로 추방됐다. 해외를 떠돌며 반스탈린주의 투쟁을 벌였던 트로츠키는  1940년 멕시코에서 스탈리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등산용 피켈에 머리를 찍혀 암살 당했다.

 

                      <트로츠키>

 

                                              <키로프>
 러시아 역사와 정치전문가들은 넴초프 암살과 가장 유사한 사례로 공산당 고위 간부였던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사건을 꼽는다.스탈린과 맞먹을 정도의 권력을 과시하던 키로프는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도중 난입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범인은 트로츠키를 흠모하던 레오니트 니콜라예프란 이름의 청년이었다.스탈린 정부는 키로프 암살범 니콜라예프와 13명의 공범들이 총살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피의 숙청시대를 열었다. 12월 한달동안에만 6500명을 체포했고, 수개월동안 수 천명이 실종됐다. 하지만 훗날 학자들은 기밀 해제된 문건을 토대로  스탈린이 대숙청 구실을 만들기 위해  키로프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러시아 정치 전문가인 카렌 다위사는 4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 푸틴이 스탈린 뒤를 따르고 있다"며 "국내에서는 야당탄압과 정치적 경쟁자의 제거, 국외에서는 조지아와 크림을 침략하고 인접국들의  민주화를 막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