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실리콘밸리를 뒤흔드는 성차별 소송

bluefox61 2015. 3. 20. 10:39

지난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정의 증언대에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몸매의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 올라섰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몸담았던 실리콘 밸리의 성차별적 문화를 작심한 듯 비판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자신이 회사 내에서 임금차별과 기회 불평등은 물론이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일을 수없이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에게는 허용되는 행동이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며, 실리콘밸리의 뿌리깊은 성차별적 관행 또는 문화를 성토하기도 했다.


 

실리콘 밸리를 뒤흔드는 성차별 소송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첨단 정보기술(IT)산업의 중심지인 실리콘밸리가 이른바 성차별 소송에 술렁이고 있다. 소송의 주인공은 엘렌 파오(45). 지난 2012년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사모펀드인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 앤드 바이어스(KPCB)의 중역으로 7년동안 일했던 여성이다. 현재 커뮤니티사이트 ‘레딧’의 임시 최고경영자(CEO)인 그가 옛 직장을 상대로 1600만달러(약 180억 원)의 성차별 손해배상을 낸 것이다. KPCB는 넷스케이프, 아마존, 구글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초기 투자한 곳으로 유명하다. 파오는 2005년부터 KPCB에서 근무하다 성차별로 인한 진급누락을 주장하며 2012년 소송을 제기했고 그해 10월 해고됐다.
 

미 언론들이 파오에 부쳐준 별명은 ‘남성(보이)클럽 실리콘밸리를 뒤흔든 여자’이다. ‘실리콘 밸리판 아니타 힐’이란 별명도 있다. 지난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 판사의 대법관 임명과정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여성 판사 아니타 힐이 의회 청문회장에 나와 성희롱 피해사실을 폭로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란 이유에서다.
 

파오는 자신이 KPCB에서 일하는 동안 임원회의때 여자란 이유로 중앙테이블에 앉지못하고 구석으로 밀려난 적이 많았고, 조금만 제 목소리를 내면 팀플레이 정신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 수시로 성적 농담 또는 작업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회사 측은 파오가 지나치게 야심적이고 독단적이며, IT 투자 전문가로서 전문지식이 부족했고, 동료들과 너무 자주 충돌했기 때문에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지난 2월 중순부터 4주째 이어지고 있는 재판에서는 한 남성 임원이 파오에게 성적인 묘사가 많은 시집을 선물로 준 사실까지 공개되는 등 ‘까발리기 전쟁’양상을 치닫고 있는 중이다. 


‘여성에게 유독한 환경’ 실리콘밸리 


실리콘 밸리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는 청바지를 입고 안경을 쓴 천재들이 자유롭게 일하면서 최첨단 IT기술을 개발해 세상에 공개하는 모습이다. 젊은 인력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업무환경으로 인식돼있기도 하다. 그러나 성평등 면에 있어서는  금융이나 제조업 등 다른 분야에 비해서 더 열악한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이다.
 

물론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마리사 마이어 야후 CEO, 멕 휘트먼 이베이 CEO,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CEO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여성 경영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로 상징되는 미국 IT기업에서 여성임원의 비율은 4%에 불과한 실정이다.


뉴스위크는 최근 기사에서 실리콘 밸리의 이같은 실태에 대해 "여성을 지독히 싫어하는 문화"라며 "젠더(성) 문제에 있어 놀라울 정도로 후진적"이라고 평하기까지 했다.1980년대와 90년대 ‘월가의 늑대(Wolf of Wall Street)’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월가는 숱한 소송경험 덕분에 젊잖아졌지만, 실리콘 밸리는 여전히 여성에게 ‘유독한 환경’이라고 뉴스위크는 지적했다. IT전문 사모펀드 카포 캐피탈의 임원인 프리다 카포 클레인 역시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실리콘밸리의 진보적인 이미지와 실상 간에는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현상을 여성의 과학적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리는 주장도 있다. 지난 2005년 로런스 서머스 당시 하버드대 총장이 과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의 숫자가 적은 것은 남녀간의 선천적 차이때문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같은 발상인 셈이다. 그러나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남성보다 교육수준과 능력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견고한 유리장벽


이런 상황에서 파오 소송은 남성 중심적인 실리콘밸리에서 성평등 이슈에 대한 관심을 비로소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 8회 여성사모펀드정상회의에서도 모든 화제의 중심이 바로 파오 재판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로렌 모젠탈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창업의 꿈을 안고 실리콘밸리에 왔지만 투자를 받는 게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물론 투자가가 어떤 사업아이템에 대한 투자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개발자의 ‘성’이 아니라 ‘실력’‘장래성’이기는 하지만, 실리콘 밸리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장벽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IT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파오 소송을 둘러싸고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파오가 KPCB에서 차별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해줄 증거와 정황이 너무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샌타클라라대 법대의 게리 스피트로 교수는 FT와의 인터뷰에서 "파오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이번 소송이 실리콘 밸리 내의 젠더(성)이슈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고 평했다. 


미국 첨단업계의 ‘유리 천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가운데 실리콘밸리 등지에 포진한 주요 정보기술(IT) 기업의 고위직 역시 남성에게 편중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IT 업체들이 공개한 자료를 파이낸셜타임스, 포춘 등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MS)의 경우 지난해 9월 기준으로 고위직 임원 중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83%인데 비해 여성은 17%에 그쳤다. 정보통신 분야 전문 매체 IT 월드는 미국 전체 노동인구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53%, 여성의 경우 47%이지만 약 12만 8000명에 달하는 MS 전체 직원 중 남성은 71%, 여성은 29%라고 보도했다. 


애플 역시 지난해 8월 자료에서 고위직 임원의 72%가 남성인데 비해 여성은 28%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돼 분명한 성적 쏠림 현상을 드러냈다. 또 지난해 1월 기준 구글의 남성 고위직 비율은 전체의 79%, 여성은 21%로 나타났다. 인텔도 이와 마찬가지로 남성이 전체 고위직의 79%, 여성이 21%를 차지했다. 야후는 남성 임원 비율이 77%, 여성은 23%였다. 전자상거래업체 이베이와 컴퓨터 등 전자기기 제조업체 휴렛팩커드는 남성 임원이 전체의 72%, 여성이 28%였다.
 

대다수 고위직을 남성이 차지하는 현상은 비교적 혁신적인 분위기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기업에서도 확인됐다. 트위터의 경우 지난해 7월 기준 전체 고위직의 79%가 남성이었으며 나머지 21%만 여성이었다.


 페이스북이 지난해 6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고위직 중 남성 비율은 77%, 여성은 23%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비즈니스 중심의 SNS인 링크드인의 경우 남성 임원은 전체의 75%, 여성임원은 나머지 25%를 차지했다. 사진 기반 SNS인 핀터레스크는 임원의 81%가 남성, 19%가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