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교황 프란치스코 탄생

bluefox61 2013. 3. 14. 11:14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76) 추기경이 13일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을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비유럽권에서 교황이 선출된 것은 시리아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오 3세(731년) 이후 1282년만에 처음이다.
 
예수회 소속 사제가 교황이 되기도 1534년 수도회 창설이후 최초이다. 새 교황은 즉위명을 프란치스코로 선택, 가톨릭의 변화와 청빈을 실천했던 13세기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일제히 전했다.
 
콘클라베 이틀째인 13일 총 5번의 투표결과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는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 광장을 메운 약 10만명의 신도들에게 이탈리아어로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의 환영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스페인어가 섞인 라틴어로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콘클라베는 로마에 주교를 앉히는 것이며, 동료 추기경들이 나를 찾기 위해 다른 세상의 끝으로 간 듯하다"며 농담을 던지고 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를 위해 기도했다. 이날 첫 인사에서 그는 '교황'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자신을 '로마 주교'로 표현해 평소의 겸허한 태도를 다시한번 나타냈다고 외신들은 지적했다.  로마 교황청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14일 시스티나 성당에서 교황으로서 첫 미사에 참석할 예정이며 공식적인 즉위미사는 오는 19일 열린다고 밝혔다.
 

새교황의 탄생에 대해 고향인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지역에서는 "라틴아메리카 가톨릭의 승리"라며 크게 반겼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최초의 미주 출신 교황의 탄생은 이 지역의 힘과 활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축하를 전한다"고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새 교황에게 "세계의 여러 종교 간의 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요청한 뒤 "교황 프란치스코가 종교 간 대화 증진에 애썼던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뜻을 이어받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266대 교황 프란치스코(76)는 고국인 아르헨티나는 물론 라틴아메리카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성직자이다. 13세기 성자 프란치스코를 즉위명으로 선택한데서 보듯, 평생 그는 '빈자들의 아버지'를 자처하며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추는 겸손한 인품으로 신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교리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자이기도 하다. 교황의 추기경 시절 공식 전기작가인 세르지오 루빈은 13일 AP통신과 인터뷰에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자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노(no)'이지만, 신자유주의와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해 비판적이고 극빈곤층과 함께하는 성직자냐고 묻는다면 답은 '예스(yes)'이다"라고 말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1936년 12월 17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거주하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의 5남매 중 한명으로 태어났다. 철도노동자 아버지,전업주부인 어머니 아래에서 어린시절부터 가톨릭 신앙 속에 성장했지만,청소년기부터 사제의 꿈을 지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대에서 화학을 전공해 석사학위까지 받았던 그는 뒤늦게 신학대에 입학했고, 22세 때인 1958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1969년 사제직을 수품한 그는 1970년대 후반까지 지방을 돌며 사목 활동을 했으며, 1980년에는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의 원장으로 발탁됐다. 이후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고국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던 그는 1992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보좌 주교, 1998년 대주교를 거쳐 2001년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됐다.

교황은 화려한 격식보다는 소박함을 중시하는 성품의 소유자이다. 2001년 추기경이 된후 현재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화려한 추기경관에 들어가 산 적이 한번도 없으며, 시내 중심가의 작은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고 옷도 수선해서 입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출퇴근때에는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을 즐겨 이용하며, 빈민촌을 자주 찾아 신도들과의 만남을 가져왔다. 각종 회의 때에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뒷줄에 앉기를 좋아하는데서 알수있듯이 나서기를 꺼리고 자신을 낮추는 편이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공식적인 자리빼놓고는 거의 해본 적이 없고, 대신 신도들과 직접 만나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쪽을 선호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전임자인 베네딕토 16세가 정통신학자였던 것과는 달리 '행동하는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빈곤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사제서품식에서 그는 이제 막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는 젊은 사제들에게 " 예수는 우리에게 (밖으로) 나가서 형제들과 교류하고 나누라고 가르치셨다.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 가르침을 전하라"고 당부했다. 

지난 2007년 라틴아메리카 주교단회의에서는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살고있다"면서 "성장은 가장 많이 하면서도 빈곤의 고통은 가장 적게 줄어드는 곳이 바로 이 곳"이라고 비판했다.노동자 파업에 대해선 " 일할 권리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빈자들과 정의를 회피하는 가진 자들 간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며 친노동자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교리적으로는 교황청의 공식 입장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이다. 동성애, 낙태, 피임, 안락사 등에 대해서는 '죽음의 문화'라고 칭하며 매우 비판적이다. 그러나 질병을 막기 위한 피임기구 사용에는 찬성하며, 동성결혼허용에는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들의 권리는 인정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동성결혼 허용, 낙태수술 허용, 피임기구 무료배포 정책을 취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아르헨티나 대통령과는 불편한 관계이다. 교황은 추기경 시절 대선과 총선에서 야권을 지지한다는 뜻을 수차례 밝히면서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지난해 연례강론 때 정부 인사들 앞에서 " 아르헨티나가 지금 선동주의,전체주의,부패에 휩싸여있다"고 강도높게 비판을 하기도 했다.

쿠데타와 군부독재가 이어졌던 1970∼80년대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는 교황 프란치스코에게도 그늘과 오점을 남겼다. 아르헨티나 일각에서는  이 시기에 예수회 최고책임자이자 고위 성직자였던 프란치스코가 군부독재에 정면 도전하지 않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지난 2010년 그는 군부통치기에 발생했던 해방신학 사제 및 신도 피납, 강제 입양 등의 사건과 관련해 재판정에 출두해 "군부가 반정부활동가들의 아이들을 탈취해 강제입양시켰던 사실을 1985년에 와서야 알게됐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희생자유족단체인 '5월 어머니회'측에서는 " 매우 비겁한 행동"이라며 비판했다. 교황은 지난해 10월 아르헨티나주교단 공동성명을 통해 독재체체하에서 소극적이었던 교회의 과오를 인정했고 군부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비판한바 있다.  


가톨릭 교회가 2000년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변화를 선택했다. 


전세계 12억명의 가톨릭 신자들 중 무려 41.3%에 달하는 4억 8300만명의 신자들이 살고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돼야한다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가톨릭의 권위를 상징하는 바티칸의 콘클라베에서 115명의 추기경들이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아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한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이변'이다. 
 

교계에서는 교황의 지역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인구통계를 근거로 교황이 선출되는 것은 아니란 입장이지만, 비유럽권 교황의 탄생은 전세계 일반인들에게 매우 놀라운 변화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교황이 나올 수있게 된 셈이다. 그만큼 교회 내부에서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돼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전임자인 베네딕토 16세가 598년만에 처음으로 자진 퇴위함으로써 '신의 대리자'인 교황 역시 한계를 가진 인간임을 나타내는 파격을 행한데 이어 '제3세계'출신 교황까지 선출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앞으로  21세기의 급격한 변화에 부응해 사회와  적극 소통하겠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한 것으로 볼  수있다. 물론 새 교황의 선출로 급격한 교리 변화는 없겠지만, 약 2000년동안 이어져내려온 가톨릭 전통에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새 교황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최우선 과제는 교회의 통합과 바티칸 관료조직의 개혁이다. 베네딕토 16세 재위기간 말기에 드러난 바티칸의 비리의혹과 권력암투 등으로 인해 교회의 권위는 과거에 비해 크게 추락한 상태이다. 유럽연합(EU)으로부터 투명성 기준 미달로 경고까지 받은 바티칸 은행의 변화도 시급하다. 바티칸 관료조직 수구파의 저항에 부딛혀 어려움을 겪었던  베네딕토 16세와 달리 바티칸 내 요직을 맡은 적이 없는 '아웃사이더' 새 교황이 과연 얼마나 과감한 변화를 단행할 수있을지 전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사제 성추행 스캔들 문제 역시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콘클라베가 열리기 직전 키스 오브라이언 영국 추기경이 성추행 전력으로 전격 사임한데서 보듯, 이 문제는 지난 10여년동안 교회의 근간을 뒤흔들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켜왔다 . 지난 1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구는 사제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1000만달러 배상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며,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초반부터 피해자를 직접 면담하는 등 관심을 나타내왔지만 성추행 사제 처벌에 있어서는 성과가 미미했던 게 사실이다. 새 교황이 만약 전임자들과 같은 행보를 취한다면 교회는 더욱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
 

이밖에 여성사제 허용, 낙태 및 피임, 동성애자 결혼 허용 등 사회변화에 따른 교회의 대응도 새 교황의 과제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 문제에 있어서 교황청의 기본입장에 충실해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내왔다. 이슬람 등 타종교와의 대화 확대, 감소하는 신도 및 사제 수를 늘이고 가톨릭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도 새 교황이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로 꼽히고 있다. 



<퍼온글>

새 교황의 즉위명인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태아나고 죽은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가난'을 모토로 하는 수도회를 설립해 평생을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예수회 출신 첫 교황으로 빈부격차가 큰 아르헨티나에서 청빈한 생활을 실천해온 것으로 알려진 새 교황이 프란치스코를 즉위명으로 택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는 지적이다. 국내외에서 가톨릭이 가진 '부유함'의 이미지를 떨쳐내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바티칸 대변인은 '프란치스코'라는 명칭이 "소박하고 박애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 중의 성인으로 손꼽히는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었을 때는 향락을 추구하고 기사가 될 꿈을 가지기도 했으나 20세에 회심한 뒤 모든 재산을 버리고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청빈을 실천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1209년 11명의 제자와 함께 청빈을 모토로 한 '작은 형제들의 모임'이란 수도회를 설립해 당시 세속화의 길을 걷던 가톨릭 교회에 쇄신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성녀인 클라라(1194∼1253)에게 권유해 여수도회(클라라 수녀회)를 설립하게 했다.
프란치스코는 만년인 1224년에 자신의 몸에 성흔(聖痕ㆍ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옆구리와 손발에 생긴 5군데 상처)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자애롭고 겸손한 인품은 물론, 그가 행한 여러 가지 기적으로 지금까지 가톨릭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다. 1979년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은 평소 동물을 아껴 동물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를 환경보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되는 '평화의 기도'와 '태양의 찬가' 등 뛰어난 시를 많이 남겨 '신의 음유시인'으로도 불린다.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사후 작은 형제회와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로 분열됐으며 현재 한국에서 모두 활동 중이다.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속한 예수회는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등과 함께 1534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한 가톨릭 남자 수도회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바람에 맞서 영성수련을 통한 자기 헌신을 생활태도로 표방한 예수회는 1540년 로마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이듬해 로욜라가 초대 총장으로 선출됐다. 새로운 수도회 정신을 앞세우며 개신교에 맞서 전 세계로 포교 무대를 확장한 예수회는 근대 서구 제국주의와 연결돼 세계 곳곳에서 충돌을 빚기도 했다. 아시아에는 1542년 사비에르가 인도를 거쳐 일본에 건너오면서 전파됐다. 일찍이 교육사업에 매진한 예수회는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 226개의 단과대와 종합대를 설립했으며 4000여 개의 중ㆍ고교와 기타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1954년 한국에 진출해 서강대와 광주가톨릭대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현재 예수회 한국관구 소속으로 이한택(전 의정부교구장) 주교를 비롯, 사제와 수사 등 186명(한국회원은 176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