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수퍼리치의 천국 스위스가 변한다

bluefox61 2013. 3. 8. 11:15

비밀금고와 초호화 별장, 그림같은 스키 리조트와 수억원짜리 명품 시계로 상징되는 '수퍼리치(super rich)의 천국' 스위스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 3일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기업 경영진의 고액보수 제한법이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된 것은 스위스 부호정책의 변화를 나타내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조세도피처란 국제사회의 비난에 무릎꿇고 비밀금고의 문을 열어 고객정보를 공개한 것을 시작으로, 전세계 부호 유치를 위해 도입했던 외국인 세금우대정책을 폐지 또는 대폭 수정하는 칸톤(주)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발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이전만하더라도 "부자들이여 어서 오라"며 칸톤마다 세금인하 경쟁을 벌였던 때와는 크게 달라진 분위기이다.



대체 무엇이 스위스를 이렇게 바꿔놓은 것일까. 파이낸셜타임스(FT), 타임지, AFP통신 등은 최근 " 스위스와 부호의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며 , 이같은 변화가 유럽은 물론 세계각국에 미칠 영향에 주목했다.


▶'비밀'포기한 비밀금고 〓 시작은 스위스의 대형은행 UBS였다. 지난 2009년 8월 UBS는 미국 법무부와 1년이상 끌어온 비밀계좌의 미국인 고객  정보 공개에 합의했다. 국내총생산(GDP)의 8.5%를 은행거래에 의존하고 있고 약 2조 달러의 외국인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스위스 금융업계가 비밀주의 전통포기를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미 국세청은 스위스에 비밀계좌를 보유한 미국인이 약 5만2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UBS는 미국고객들의 탈세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미 법무부로부터 형사소송을 당할뻔했다가 지난해 7억8000만달러의 합의금을 내고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지난해 그리스를 뒤흔들었던 일명 '라가르드 리스트'도 스위스 비밀금고를 이용하고 있는 정치인 및 부호들의 명단이었다. 

2009년 프랑스 재무부는 HSBC 스위스 지사 등으로부터 비밀계좌 소유 외국인 약 2만 명의 명단을 확보했고, 프랑스는 물론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국세청이 이 자료를 근거로 조사를 벌였다. 다른 나라처럼 명단을 넘겨받았던그리스 정부는 이를 묵살했다가 국민들의 질타를 받았다.
비밀금고로 부호들의 탈세를 도왔다가 거액의 벌금을 내고 아예 문을 닫는 은행도 있다. 1741년 설립돼 스위스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베겔린은행은 지난 10여년동안 미국조세 약 12억달러를 빼돌리는데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5780만달러의 벌금과 1620만달러의 민사소송 합의금을 내게 됐고, 결국 더이상 버틸 여력이 남지 않아 창립 272년만에 문을 닫게 됐다.
스위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권고에 따라 조세정보교환협정을 체결한 나라로부터 이른바 '그룹 리퀘스트(group request)를 받을 경우 자국은행에 예치된 탈세혐의 외국인 계좌정보를 해당국가에 넘겨줄 수있도록 법 개정도 진행 중에 있다. '그룹 리퀘스트'란 OECD의 정보교환기준에 마련된 조항으로, 탈세창구로 파악된 은행상품 등에 등록된 소유자의 정보를 모두 요구할수있는 포괄적 정보요구권을 말한다. 한국 정부도 탈세수단으로 스위스 비밀계좌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스위스 정부로부터 일괄적으로 넘겨받기 위해 '그룹 리퀘스트'를 추진 중이다.

 

▶부호 우대 정책 속속 폐지 = 스웨덴 가구업체 이케아의 설립자 잉그바르 캄프라드, 카레이서 미하엘 슈마허, 가수 필 콜린스 등 세계각국들의 부호들이 자국을 떠나 스위스에 둥지를 튼 가장 큰 이유는 세제혜택 때문이다. 

로잔 인근에 살고 있는 캄프라드는 약420억달러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시와 칸톤 정부에 내는 세금은 그리 많지 않다. 각 칸톤이 해외의 부호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주민세, 소득세, 재산세 등을 크게 감면해주는 정책을 취해온 덕분이다.  그러나 지난 2009년 취리히 칸톤이 세수확보를 위해 외국인 부호 우대 조세정책을 주민투표를 거쳐 전격 폐지한데 이어, 추크와 베른 칸톤은 외국인 부호들에 대한 특별세 부과를 결정했다. 

샤프하우젠, 아펜젤, 바젤 칸톤 등도 부호 우대 조세정책 폐지를 검토중이다. 최근 AFP통신은 스위스의 26개 칸톤 중 상당수가 외국인 부호를 우대해온 각종 정책을 폐지하거나 과세강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방정부 역시 외국인 부호를 대상으로 과세율을 높히는 방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대기업 및 은행 경영진의 천문학적 금액의 보수도 철퇴를 맞았다. 스위스에서 경영진의 과다한 보수가 사회문제화된 것은 지난 2008년이다. 뉴욕발 금융위기로 UBS의 당시 회장 마르셀 오스펠이 500억 달러가 넘는 경영손실을 내 연방정부 구제금융까지 받았으면서도, 퇴진하면서 천문학적인 급여를 챙기게 되자 전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 

당시 주총에서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했던 기업가 출신 토마스 민더는 2011년 무소속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 지난 3일 경영진 고약보수 제한법의 국민투표 통과를 실현시켰다. 일부 정당들은 최고경영자(CEO)급여를 최저급여자의 12배 이내로 제한하고 상속세율을 높이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고 FT는 최근 전했다. 




▶재정위기가 바꿔놓은 풍토 = 전세계 부호들을 환영했던 스위스가 이처럼 변화하게 된 것은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담보대출) 사태로 미국은 물론 유럽의 대형은행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하고 각국이 심각한 재정난에 처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재정난과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한푼의 세금이 아쉬운 상황에서 각국 정부는 조세도피처로 여겨져온 스위스에 대해 총공세를 퍼붓고 있다. 신용과 비밀주의로 세계각국의 돈을 끌어모아왔던 스위스가 탈세의 온상이 돼버린 셈이다. 이런 상황은 스위스 국민들로 하여금  '자본가의 탐욕'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2월 세계적인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다니엘 바셀라 회장이 퇴직후 라이벌 기업에 재취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7800만달러의 보수를 받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스위스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노바티스를 성토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셀라 회장을 둘러싼 논란은 3일 국민투표에서 고액 보수 규제안이 7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데 한 몫했다는 분석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는 여전히 부호들이 선호하는 국가이다. 유럽 한가운데라는 지역적 잇점과 더불어 사회가 안정되고 부패가 없으며 사치와 안락을 만끽할 수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기때문이다. 

공공정책 전문가인 취히리대의파브리지오 질라르디 교수는 FT와 인터뷰에서 " 3일 국민투표는 경영자 보수제한보다는 주주의 발언권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국민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명할 수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스위스적 가치"라고 말했다. 스위스 국민들의 달라진 인식이 과연 자본주의의 과도한 탐욕에 더욱 강력한 재갈을 물릴 것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 CEO 보수 규제,어디까지 왔나
 

지난 3일 스위스에서 기업경영진의 보수를 제한하는 국민발의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후 유럽 각국에서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집권 사회당을 중심으로 규제안을 검토 중이고, 독일에서도 9월 총선 전에 스위스와 비슷한 법안을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이미 은행 임원 보너스에 대한 규제를 결정한 상태이다. 유럽의회와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2월 27일 은행 경영진의 상여금이 고정 연봉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관련 법안에 합의했다. 법안에 따르면 유럽 은행 경영진의 상여금은 주주들 다수가 동의할 때만 고정 연봉의 2배까지 늘어날 수 있다. 

EU은 보너스 규제를 은행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에까지 확대할 계획으로 있다. EU 역내시장ㆍ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실의 슈테판 데 링크 대변인은 지난 4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 경영진의 보수를 주주가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을 올해 말까지 법제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반대목소리도 만만치않다. 가장 강하게 저항하는 국가는 '금융 중심국'을 자처하는 영국이다.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 5일 의회에 출석해 "은행가들의 보너스를 규제하려는 EU의 계획은 영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피아트와 크라이슬러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최고경영자(CEO)는 "파리 한 마리를 잡으려고 큰 망치를 휘두르는 격으로,망치로 파리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다 벽까지 무너뜨릴 것"이라면 경영진 보수에 대한 지나친 규제가 기업의 경쟁력 감소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