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그가 돌아왔다..무덤에서 되살아난 리처드 3세

bluefox61 2013. 2. 7. 11:25

2012년 9월, 영국 레스터대의 고고학자 조 애플바이와 매튜 모리스는 중부도시 레스터의 한 공영주차장 발굴현장에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두 사람을 포함해 레스터대 발굴팀원들은 이곳에서 2주째 발굴작업을 벌여오고 있던 참이었다. 뉘엇뉘엇 해가 저물어가고 있던 순간, 흙사이에서 무엇인가 보였다. 사람의 다리 뼈였다. 

 

<영국 레스터주 레스터의 시의회 공영주차장 땅 속에서 발굴된 리처드 3세의 유골. 레스터대 발굴팀은 

구덩이에서 관은 물론 옷의 흔적도 발굴되지 않았고 휘장이나 반지 등 왕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 

일체 없었다는 점에서, 리처드 3세가 전사한 후 옷이 벗겨진채 서둘러 매장된 듯하다고 밝혔다. 

리처드 3세의 신체적 특징인 척주기형이 뚜렷히 나타나있고, 두 손이 포박돼있다. >

 

두사람은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흙을 헤집기 시작했다. 두개골이 나왔고, 곧 척추 뼈도 발견됐다. 심하게 한쪽으로 굽어져있는 척추뼈를 보는 순간 애플바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목 뒤의 잔털이 일제히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옆에 있던 모리스는 나즈막하게 '와'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발굴현장(위)과 지난해 8월 25일 발굴작업이 시작되기 전 주차장이었을 당시의 모습>

 

그로부터 약 5개월 뒤인 지난 4일 ,발굴팀의 대장인 리처드 버클리 교수는 대학 강당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의 무대에 올라섰다. 영국 곳곳은 물론 전세계에서 몰려온 주요매체 기자들과 학자들로 발디딜 틈없는 기자회견장은 기대감과열기로 꽉차 터져나갈 듯했다. 버클리 교수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레스터에서 발굴한 유골이 영국 플랜타지네트 왕조의 마지막 국왕 리처드 3세란 학술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조카들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악인, 선천적인 척추기형으로 인해 '곱사등이'로 놀림을 당했던 불구자, 30년에 걸친 왕위계승전쟁인 '장미전쟁'을 끝낸 보스워스전투에서 전사한 후 종적이 묘연했던 불우한 국왕 리처드 3세(1452년 10월 2일∼1485년 8월 22일)의 유골이 528년만에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사악한 국왕이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명작 '리처드 3세'로  전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돼있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굴된 후 영국사회는 물론 세계고고학계가 흥분하고 있다.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이집트의 소년 파라오 투탄카멘 미이라를 발굴한 이후 국왕의 유골이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기는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적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특정 인물의 유해를 찾기 위한 발굴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리처드 3세의 유골에 대한 연구결과에 따라 영국 중세사를 다시 써야할 것이란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는가하면, 내년 쯤 거행될 리처드 3세 재매장 장례식이기 왕실결혼 못지않은 세기의 이벤트가될 것이란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리처드 3세의 유골발굴은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의 열정, 레스터대 연구팀의 끈기와 정확한 판단력, 리처드 3세의 살아있는 후손을 찾아낸 혈통연구가들의 노력, 그리고 최첨단 DNA 테스트 등 4박자가 절묘하게 들어맞은 결과였다.   

리처드 3세에 대한 재평가를 촉구하는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리처드 3세 협회'는 지난 수십년동안 끊임없이 정보를 캐내며 학계에 자극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지원기금까지 내놓았며, 보스워스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레스터대 학자들은 수많은 문헌 연구와 데이터를 토대로 리처드 3세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그레이프라이어스 수도원 성당 터를 정확하게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혈통연구가들은 이미 지난 2005년 캐나다까지 건너가 리처드 3세의 17대 외조카 2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이들이 제공한 DNA는 주차장 터의 유골이 리처드 3세임을 증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버클리 교수는 4일 기자회견에서 " 후손들의 DNA와 유골의 DNA가 일치할 확률이  1∼2% 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치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들이 리처드 3세 유골발굴과 확인 과정 자체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와 미국 수사드라마 'CSI' 를 합쳐놓은듯 흥미진진하다고 지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처드 3세  전신 유골. 척추기형이 뚜렷하다>

 

<두개골 부분. 머리 윗쪽의 큰 구멍은 무거운 쇠망치같은 커다란 둔기에 맞아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두개골에만 최소 8개의 치명적 상처가 있고,갈빗뼈 등 각 부분에 창에 찔리거나 화살에 맞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뼈 아래에서는 화살의 촉부분이 발굴되기도 했다.>


 

레스터대 발굴팀은 DNA 테스트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문제의 유골이 리처드 3세란 확신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유골이 나온 지점이 리처드 3세의 매장지로 기록된 곳과 비교적 일치하는데다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1455∼1540년 사이에 사망한 30대 남성의 유골로 판명됐기 때문이었다. 고기와 생선 등 육식을 많이 한 흔적이 뼈에 남아있는 것도 고인이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이란 증거였다. 두개골 8곳의 치명적인 상처와 갈빗뼈 등 온몸에 난 상처들은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입었다는 것들과 대체로 일치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는 물론 한쪽으로 심하게 굽은 척추뼈였다.

  

 

<리처드 3세의 17대 외조카뻘인 마이클 입센이 TV방송사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국적은 캐나다이며, 현재 런던에서 가구제조업자로 일하고 있다. 혈통학자들이 캐나다에 있는 리처드 3세의 후손을 찾아낸 것은 이미 2005년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학자들은 리처드 3세의 누이인 '요크의 앤' 의 모계후손들의 미토콘드리아를 추적하는 식으로 입센을 찾아냈다.>

 

 

전문가들은 유골이 10년전에만 발굴됐어도 이번처럼 신속하게 확인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지적했다. 당시만 해도 DNA 기술에 한계가 있었기때문이다. '리처드 3세 협회'의 열혈회원인 극작가 필리파 랭리는 가디언, BBC 등과 인터뷰에서 " 마치 리처드 3세가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내고 발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같다"면서 "과학과 지성, 장애인에 대한 관념이 과거와는 달라진 지금이야말로 그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줄 수있는 때가 됐다고 생각한 듯하다"며 감격했다.
 

학계가 풀어야 할 리처드 3세에 대한 숙제들은 이제부터이다.  그가 어떤 정황에서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규명해야할 뿐 아니라 역사적 재평가 작업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1674년 런던탑의 계단 밑에서 발굴된 12살과 9살짜리 어린이 유골이 과연 삼촌 리처드 3세에 의해 목숨을 잃은 에드워드 5세와 동생의 유골인지도 DNA테스트를 통해 규명해야할 과제이다. 

현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돼있는 두 어린이의 유골을 다시 꺼내 리처드 3세DNA와 일치하는지 조사해야한다는 주장이 많지만 성공회와 왕실은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불일치 판정이 나올 경우, '영국판 세조'격인 리처드 3세의 악행을 수정해야할지도 모른다. 미스터리는 갈수록 흥미진진해질 전망이다. 

 

 

 

 

 

<위에서부터 리처드 3세 유골과 유골을 기초로 재연한 리처드 3세상, 

그리고 영화 '리처드 3세'의 이언 매켈런.

 

 

리처드 3세는  영국의 중세인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다. 1483년 형인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12살짜리 조카가 즉위해 에드워드 5세가 되자 글로스터공작이었던 그는 어린 조카를 옆에서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섭정이 됐다.

그러나 2달뒤 영주회의에서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적법하지 않았음으로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5세의 왕위 또한 인정할 수없다는 결정을 이끌어낸 뒤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가로챘다. 이후 에드워드 5세와 동생은 종적이 묘연해졌는데, 런던탑에 갇혀 지내다가 사망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로부터 200여년만에 런던탑에서 어린이 2명의 유골이 실제로 발견되면서 리처드 3세의 악행은 사실로 굳어졌고, 1485년 8월 22일 오늘날의 레스터 지역에서 벌어진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한 후 현재까지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사악한 국왕으로 평가받아왔다.
 

영국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리처드 3세가 가까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걸출한 희곡 '리처드 3세' 덕분이다. 리처드 3세를 보스워스전투에서 죽이고 튜더왕조를 연 헨리 튜더는 셰익스피어의 후원자였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할아버지였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에서 리처드 3세를 맥베스와 '오텔로'의 모사꾼 이아고를 합쳐놓은 듯한 악인으로 묘사했다. 

학자들은 리처드 3세가 후대에 천인공로할 악인으로 각인된 데에는 튜더왕조가 학자, 작가 등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펼쳤던 프로퍼갠다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튜더왕조의 선전꾼에 머물지 않고 리처드 3세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해낸 셰익스피어>


 

하지만 역시 셰익스피어였다. 리처드 3세를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인으로 묘사하되, 예리한 지성과 명석한 두뇌를 지닌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낸 것. "세상이 원한다면 기꺼이 악인이 되겠노라"란 대사는 연극 '리처드 3세'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 리처드 3세는 마치 악인역할을 맡은 배우같은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가차없는 증오와 냉소를 퍼붓는 리처드 3세는 수백년이 지난 21세기 현재까지도 수많은 연극팬들에게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매혹적인 캐릭터로 자리잡고 있다. '반지의 제왕'시리즈의 간달프로 유명한 영국의 성격파 배우 이언 매켈런은 1995년 영화판 '리처드 3세'에서 마치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케하는 섬뜩한 캐릭터를 창조해내 극찬받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영국의 역대 왕조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 고대 시대

* 켈트 족 거주, 케사르의 원정(B.C. 55) - 로마의 통치를 받음.


♣ 앵글로 색슨 왕조

◈ 웨섹스가(Wessex 家)
(1) 엑버트(829 ∼ 839) - (2) 에델울프(839 ∼ 858) - (3) 에델볼드(858 ∼ 860) - (4) 에델버트(860 ∼ 866) - (5) 에델레드 1세(866 ∼ 871) - (6) 알프레드 대왕(871 ∼ 899) - 에드워드1세(899 ∼ 924) - (8) 에델스탄(924 ∼ 940) - (9) 에드먼드 1세(940 ∼ 946) - (10) 에드레드(946 ∼ 955) - (11) 에드위(955 ∼ 959) - (12) 에드거(959 ∼ 975) - (13) 에드워드(975 ∼ 978) - (14) 에델레드 2세(978 ∼ 1016) - (15) 에드먼드 2세(1016)

◈ 댄가(Dane 家)
(16) 카누트 대왕(1016 ∼ 1035) - (17) 하롤드 1세(1035 ∼ 1040) - (18) 하르디카누트(1040 ∼ 1042) - (19) 에드워드(1042 ∼ 1066) - (20) 하롤드 2세 (1066)

 

♣ 노르만 왕조(1066 ∼ 1154)
롤로(조대 노르망디 공) - 윌리엄 - 리처드 1세 - 리처드 2세 - 로버트 - (1) 윌리엄 1세 (정복왕 1066 ∼ 1087) - (2) 윌리엄 2세 (1087 ∼ 1100) - (3) 헨리 1세(1100 ∼ 1135) - (4) 스티븐(1135 ∼ 1154)

 

♣ 플랜테지넷 왕조(1154 ∼ 1399)
(1) 헨리 2세(1154 ∼ 1189) - (2) 리처드 1세(1189 ∼ 1199) - (3) 존(無領王 1199 ∼ 1216) - (4) 헨리 3세(1216 ∼ 1272) - (5) 에드워드 1세(1272 ∼ 1307) - (6) 에드워드 2세(1307 ∼ 1327) - (7)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에드워드(흑태자 1376 死) - 존(랭카스터 공) - 에드먼드(요크 공) - (8) 리처드 2세(1377 ∼ 1399)

◈ 랭카스터가(Lancaster 家)
(1) 헨리 4세(1399 ∼ 1413) - (2) 헨리 5세(1413 ∼ 1422) - 헨리 6세(1422 ∼ 1461)

◈ 요크가(York 家)

- (4) 에드워드 4세(1461 ∼ 1483) - (5) 에드워드 5세(1483) - (6) 리처드 3세(1483 ∼ 1485)

 

 

♣ 튜더 왕조(1485 ∼ 1603)
(1) 헨리 7세(1485 ∼ 1509) =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 - (2) 헨리 8세(1509 ∼ 1547) - (3) 에드워드 6세(1547 ∼ 1553)(시모어의 아들) - (4) 메리 여왕(1553 ∼ 1558)(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캐서린의 딸) - (5) 엘리자베스 1세(1558 ∼ 1603)


♣ 스튜어트 왕조(1603 ∼ 1714)
(1) 제임스 1세(1603 ∼ 1625. 스코틀랜드 메리여왕 아들) - (2) 찰스 1세(1625 ∼ 1649) - (청교도 혁명<1649>. 공화정 시대<1649 ∼1660> ) - (왕정복고<1660>) - (3) 찰스 2세(1660 ∼ 1685) - (4) 제임스 2세(1685 ∼ 1688) - (5) 메리 여왕(1688 ∼ 1694)와 윌리엄 3세(1688 ∼ 1702)의 공동 통치 - (6) 앤 여왕(1702 ∼ 1714)

 

♣ 하노버 왕조(1714 ∼ 1917)
(1) 조지 1세(1714 ∼ 1727) - (2) 조지 2세(1727 ∼ 1760) - (3) 조지 3세(1760 ∼ 1820) - (4) 조지 4세(1820 ∼ 1830) - (5) 윌리엄 4세(1830 ∼ 1837) - (6) 빅토리아 여왕(1837 ∼ 1901) - (7) 에드워드 7세(1901 ∼ 1910)


♣ 윈저 왕조(1917 ∼ )
(1) 조지 5세(1910 ∼ 1936) - (2) 에드워드 8세(1936) - (3) 조지 6세(1936 ∼1952) - (4) 엘리자베스 여왕(195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