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블랙스완'보다 더한 볼쇼이 막장드라마

bluefox61 2013. 2. 1. 11:30

 예술감독은 퇴근하다 집 앞에서 복면괴한에게 황산테러를 당했다. 사건 후 한 수석무용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면서 탈퇴를 선언했다. 모두 보름남짓한 짧은 기간내에 러시아의 볼쇼이 발레단에서 벌어진 일이다.

 

인도,파키스탄에서나 벌어지는 일인줄 알았던 황산투척테러가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을 겨냥해 일어났다는 사실에 전세계가 충격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세계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볼쇼이 발레단이 심각한 모럴 해저드로 인해 내부로부터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염산테러 사고 전 세르게이 필린 볼쇼이 예술감독>


<사고발생 며칠 후 모스크바 병실에서 한 TV방송사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필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영진의 부패, 단원들간의 암투, 입장권을 빼돌려 사익을 챙기는 암표조직 등 볼쇼이 내부 비리에 대한 증언도 이어지고 있다. 

2003년 발레단을 떠난 프리마돈나 아나스타샤 볼로슈코바는 31일 독일 슈피겔, 영국 가디언, 텔레그래프,AFP통신 등과 인터뷰에서 "경영진이 발레리나들을 정계인사나 부호와 연결시켜주는 일이 다반사"라고 폭로하기까지 했다. 제안을 거부하면 주요배역에서 제외되고, 모든 단원들이 희망하는 해외공연투어에서 빠지게 되기때문에 어쩔수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그는 " 볼쇼이가 사실상 권력자 스폰서의 에스코트 서비스 기관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서구에서 에스코트 서비스는 성매매로 간주된다.  


황산투척 사건은 지난 1월 17일 모스크바 시내의 한 주택가에서 발생했다. 세르게이 필린(42) 예술감독은 그날 자정 조금 전 막 아파트에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필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필린에 따르면, 얼굴을 가린 어떤 남자가 어둠속에 서있었다고 한다. 

한쪽 손에는 유리컵 크기만한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그때 필린은 남자가 자신에게 총을 쏘려한다고 생각했다. 몸을 돌려 뛰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남자가 더 빨랐다. 그 괴한은 총을 쏘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필린을 향해 던졌고, 컵에서 쏟아진 액체를 얼굴에 맞은 필린은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 눈바닥에 쓰려졌다. 액체는 염산이었다. 

비명을 듣고 뛰어나온 아파트 관리인이 땅바닥의 눈으로 필린의 얼굴을 닦아주려했지만, 이미 그의 얼굴과 두피는 황산에 중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소동 속에 괴한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필린은 괴한이 뿌린 황산을 맞아 얼굴과 두피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양쪽 눈 모두 실명위기였으나, 줄기세포 시술을 받아 한쪽 시력은 겨우 회복할 수있을 전망이다. 

마흔둘의 나이에도 소년같은 풋풋함을 지녔던 그의 외모가 얼마나 훼손됐는지는 현재 예상할 수없을 정도이다. 인도,파키스탄에서 염산테러를 당한후 눈코입 구멍만 남은 여성들의 끔찍한 얼굴들을 떠올려보면, 그가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있을 것같다.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인 필린은 지난 1월 28일 방송사와 인터뷰에서 "나를 공격한 사람을 용서하며, 그에 대한 심판은 신에게 맡기겠다"고 말했다. 필린은 이르면 이번 주말 독일에서 추가치료를 받을 계획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필린은 이미 수주전부터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페이스북이 해킹당했고, 휴대전화로 이상한 전화가 자꾸 걸려오곤 했던 것. 전화를 받으면 상대방이 아무 소리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2011년 3월 볼쇼이의 예술감독직을 맡은 후 사실 그는 하루도 편할날이 없었던 듯하다. 20년 넘게 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았던 그는 전통에만 매달리는 발레단의 분위기와 레퍼토리를 과감하게 혁신하려했고, 이 과정에서 발레단내 전통고수파는 물론 골수 볼쇼이팬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한몸에 받아오던 터였다. 

필린은 볼쇼이 역사상 최초로 미국 댄서 데이비드 홀버그를 수석무용수로 고용했는가하면, 2013년 시즌을 위해 영국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와 프랑스 안무가 장 크리TM토프 메이요를 고용하기도 했다. 안팎의 반대가 얼마나 거셌는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니콜라이 치스카드리제>


게다가 예술감독직을 놓고 공개적으로 경쟁했던 남성 무용수 니콜라이 치스카리드제와의 불화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딛혔고, 치스카리드제 팬들은 필린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공공연히 협박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급기야 치스카리드제 팬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필린 예술감독을 맹비난하면서 그를 해고하고 치스카리드제를 볼쇼이의 새 예술감독으로 임명해달라고 청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실 볼쇼이 발레단내의 불화와 질시, 암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술감독은 무용수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졌다해도 과언이 아닌 자리이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보듯, 아무리 프리마돈나라할지라도 감독에게 밉보이면 배역을 얻지 못하게 되며, 감독의 눈에 들면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있기때문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전세계 어느 무용단에서나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경쟁 댄서의 토슈즈에 유리조각을 넣어놓는다던지 하는 일도 심심치않게 벌어지는게 바로 발레계이다. 하지만 러시아, 그것도 볼쇼이 발레단에서는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레 댄서가 서구의 록스타만큼이나 인기와 명성, 부까지 얻을 수있는 존재인 러시아에서, 세계최고 댄서들이 모인 볼쇼이 발레단이다보니 단원들간의 질시와 암투, 그리고 예술감독에 대한 애증은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필린의 전임자였던 게나디 야닌 사건이다. 필린처럼 댄서 출신으로, 2009년부터 예술감독으로 활동해온 야닌이  2011년 3월 갑자기 사임을 발표했다. 두아이를 둔 이혼남이었던 그가 남자들과 동성애를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들이 인터넷에 대량으로 유포된 직후였다. 

러시아에서 동성애 행위는 형사처벌을 받을 수있는 범죄이다. 남성 발레 댄서들 중 다수가 동성애자인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예술감독의 극히 사적인 성생활이 이런 식으로 폭로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발레단 안팎에서는 예술감독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로 빚어진 일이란 분석이 쏟아졌다. 그의 후임으로 논의됐던 사람이 필린과 치스카리제였고, 결국 볼쇼이의 꽃이라는 예술감독직은 필린에도 돌아갔다. 


<게나디 야닌>


1776년 창단돼 2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볼쇼이 발레단은 러시아 최고의 문화 기관이다. 러시아가 공산화된 이후에도 볼쇼이는 공산정권의 최고 홍보단 노릇을 해가면서 명성을 이어나갔고, 민주화이후 한때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린다는 설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여전히 세계최고의 발레단으로서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러다보니, 부패와 비리가 하나의 전통으로 뿌리를 내렸다. 지난 2003~2008년 볼쇼이극장의 대대적인 개보수 때 당초 예산보다 16배나 많은11억달러의 돈이 쏟아부어졌는데, 그 돈의 상당부분은 경영진 일부에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0일 슈피겔지는 '안드레이'란 가명의 중진 댄서가 인터뷰에서, 입장권을 암표시장에 빼돌려 돈을 챙기는 극장사람들이 누군지, 어떤 남성 댄서가 부호의 노리개 노릇을 하고있는지 폭로했다고 전했다. 물론 이름과 구체적인 내용은 기사로 공개되지 않았다.

 

황산투척 사건의 목적과 범인은 사건 발생 후 보름가량 지난 현재까지도 오리무중이다. 단원간의 불화설, 모종의 이권을 둘러싼 갈등부터 섹스가 연관된 소문까지 분분하다. 필린은 동료 여성 댄서와 결혼한후 두 자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야닌 경우처럼 결혼했거나 결혼경력이 있는 댄서들 중 사실은 동성애자인 사람이 적지 않다. 용의자 1순위로 꼽혔던 발레단내 최대 경쟁자인 치스카리제는 경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혐의점은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자신도 이번 사건에 대해 '충격적"이라면서 필린의 조속한 회복을 빌고있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후 전세계 무용계에서는 개탄하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필린의 절친이자 독일 베를린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인 블라디미르 말라코프는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독살하려고 혈안이 된 메디치 시대로 되돌아간 것같다"고 토로했다. 익명의 단원인 '안드레이'는 볼쇼이 이권에 마피아가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야닌의 전임자인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전 예술감독은 2009년 1월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 극장에는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 박수꾼, 암표상, 자신의 아이돌을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든 하려는 반미치광이 팬들, 이 모든 것이 볼쇼이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말한 바있다. 아나톨리 이크사노프 총감독은 텔레그래프지와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게 이제는 부끄럽지도 않다. 볼쇼이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발레단 내에서는 이크사노프 총감독의 전횡, 부패도 만만치 않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볼쇼이 내분이 도를 넘는 수준이 되자, 발레단을 떠나는 인재들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프리마돈나 중 한명인 스베틀란 룬키나는 30일 "볼쇼이를 떠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현재 남편과 함께 캐나다에 체류 중인 그는 곧 무대에 오를 볼쇼이 공연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발레단측은 룬키나가 일시적인 휴직을 요청해와 받아들였다면서 탈단을 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