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말년의 스베틀라나는 위스컨신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게 홀로 지냈으며, 최근 3년간은 요양소에서 생활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위스컨신의 한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가 내 인생을 부숴뜨렸다"면서 " 스위스,인도, 미국 등 전세계 어느 곳에서 있든 나는 늘 스탈린이란 아버지 이름의 정치적 죄수였다"고 토로했다.
굴곡으로 점철됐던 스베틀라나의 인생은 한편의 거대한 러시아 대하소설을 닮았다.
스탈린의 딸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받았던 그의 삶의 첫번째 고난은 6세때 1932년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나데즈다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맹장염으로 발표됐다. 스베틀라나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된 것은 10년쯤 뒤였다.
아버지 스탈린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첫사랑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아버지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 결혼과 이혼을 두번이나 반복하며 방황했던 그는 53년 스탈린 사망후 어머니의 성을 따 알리류예바로 이름을 바꾸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했으나, 다시 사랑에 빠진 인도인 공산주의자 브리제시 싱의 병사로 다시한번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67년 싱의 유해를 유가족에게 전달한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아 인도로 출국한 스베틀라나는 뉴델리의 미국 대사관에 전격 망명했다. 스탈린의 딸이 소련을 버리고 미국을 택했다는 사실은 당시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소련은 당혹해했고, 미국은 흥분했다. 소련의 발레 스타 루돌프 누리예프 미국 망명이후 최대 사건이었다. 영국 등을 거쳐 미국에 입국했을때, 공항에는 그의 도착순간을 취재하기 위한 미 언론들의 경쟁이 치열했었다.
스베틀라나는 70년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와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고 딸 올가를 출산했다. 피터스는 저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와 같은 건축회사에 몸담고 있는 촉망받는 건축가였다. 하지만 스베틀라나는 3년뒤 또다시 이혼의 아픔을 겪는다. 소련에 남겨두고 온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1984년 전격 귀국했던 그는 2년뒤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이후로는 2권의 자서전을 발표해 주목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조용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NYT에 따르면,스베틀라나는 영국에선 가난한 노인시설에서 거주한 적이 있고, 스위스에서는 수녀원에 머물기도 했고, 미국 위스컨신에서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에 산 적도 있는 등 서방국가에서도 쉽지않은 삶을 살아왔다.
스베틀라나는 지난해 위스컨신의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내 운명을 탓할 수는 없지만, 때론 어머니가 왜 평범한 목수와 결혼하지 않았을까란 원망이 들기도 한다"고 고백했다고 NYT는 전했다.
'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 > 내가 본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큐리오시티 (0) | 2011.11.24 |
---|---|
유럽은행들, ECB에 SOS (0) | 2011.11.23 |
나니 모레티와 베를루스코니 (0) | 2011.11.14 |
망언종결자 베를루스코니 (0) | 2011.11.09 |
그리스와 한국..그리스 국민투표와 한국 무상급식 주민투표 (0) | 2011.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