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김정일, 카다피, 오사마 빈 라덴, 무바라크 등 악명높은 독재자와 테러리스트들이 한꺼번에 죽음을 맞거나 몰락했다. 또 많은 국가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새로운 지도자들이 탄생됐다.
그러나 2011년 한해동안 세상을 이끌었던 진정한 영웅은 바로 '보통사람들'이다. 독재정권의 실정에 분노해 분신자살한 한 튀니지 청년의 죽음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거센 민주혁명을 촉발시켰으며, 유럽과 북미에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99% 의 시민들이 1% 의 가진자들을 향해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인터넷에서도 룰즈섹, 어나니머스 등 '얼굴없는 핵티비스트(해킹과 액티비스트의 합성어)'들이 권력에 도전하면서 맹활약했다. 니캅(눈만 빼고 전신을 가리는 이슬람 여성겉옷) 으로 얼굴을 가린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은 자동차 운전대를 잡음으로써 여성인권을 탄압하는 정부에 도전했고, '죽음의 후쿠시마(福島) 원전'안으로 들어가 사투를 벌였던 일본 도쿄전력의 직원들은 사태수습에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에 실망한 일본 국민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이처럼, 2011년 한해동안 '보통사람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서 변화를 주도했다.
모하메드 부아지지
이슬람 민주혁명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고등학교 중퇴후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 거리에서 무허가로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그는 지난 2010년 12월 17일 단속반원에게 걸려 모진 모욕을 당한 뒤 시청 앞에서 분신한지 18일만인 1월 5일 결국 사망했다. 26세 청년의 죽음은 23년에 걸친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독재정권과 부패에 짓눌렸던 튀니지 국민들의 분노에 폭발시켰고, 그가 사망한지 불과 2주 뒤 벤 알리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한달전까지만도 친지를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던 부아지지란 이름은 튀니지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민주혁명의 상징이 됐다.
튀니지에 부아지지가 있다면, 이집트에는 칼레드 사이드가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28세 사업가 청년 사이드가 경찰에 의해 사망한 날짜는 2010년 6월이었지만, 그의 죽음이 이집트에서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것은 튀니지 민주혁명이 발생한 1월 이후부터였다. 부패한 경찰이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올렸다가 경찰에 끌려간 그는 처참하게 맞아 일그러진 시신으로 변해 가족의 품에 돌아왔다.
튀니지 시위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우리 모두 칼레드 사이드'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무려 50만명이 넘는 가입자들이 몰렸고, 이들은 1월 25일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몰려가 30년간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외쳤다.
'우리 모두 칼레드 사이드'페이지를 만든 사람은 구글의 간부직원인 와엘 그호님이었다. 중동 북아프리카 마케팅 책임자였던 그는 다국적 기업의 간부로서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버리고 반정부 사이버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경찰에 체포된지 약 열흘만에 풀려난 그는 현지TV 방송과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 영웅은 내가 아니라 거리에 나선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통사람들의 혁명'은 경제난 속에 긴축과 실업의 고통으로 겪던 유럽인들을 각성시켰다. 마치 재정위기의 주범인양 취급당하면서 하루아침에 구조조정당해 실업자 신세가 된 직장인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 얻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워진 청년들은 분노의 함성을 담아 거리로 나섰다.
5월부터 계속된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 들의 시위, 공교육 개선을 요구하며 일어선 칠레의 등록금 시위, 인도의 반부패 시위, 주택정책에서 촉발된 이스라엘 대규모 시위 , 그리고 자본주의 심장인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점령하라(Occupy)'시위 등은 모두 1%의 탐욕에 분노한 99% 보통사람들 저항이었다. 또한 1991년 옛 소련 붕괴 이후 유일한 정치·경제 대안으로 채택돼 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양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좌절의 표현이었다.
기성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때마침 확산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결합하면서 지도자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점령하라'시위는 구체적인 목표와 조직력이 약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부자들을 긴장시켰고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이른바 '부유세'도입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올 한해 지구촌 곳곳의 시위에서 여성들이 맹활약한 것도 특징적인 현상이다. 칠레 최고 명문인 국립 칠레대 총학생회(FECH)회장이었던 카밀라 바예호(23)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코에 피어싱을 한 튀는 외모에다가 뛰어난 연설 솜씨까지 갖춰 시위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마날 알샤리프(32)도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여성의 자동차운전이 사실상 금지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는 '여성 운전권 획득'투쟁을 벌여 전세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정보통신(IT) 업체에서 일하는 컴퓨터 보안전문가인 알 샤리프는 지난 5월 자신이 운전하는 모습을 '여성이 운전을 하는 게 뭐가 나쁜가'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렸다.
그의 동영상은 10만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용감한 행동'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다음날 알 사리프는 체포됐지만, 곧 석방됐고, 석방된 다음날 다시 운전하다 구속됐으나 들끓는 전세계 여론속에서 석방됐다. 그는 "운전은 우리의 가장 작은 권리"라며 "계속 싸우면 더 큰 권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의 뒤를 이어 몇몇 여성들이 차를 몰고 나와 '운전투쟁'을 벌였다. 용기있는 이들 여성들의 힘 때문인지 사우디는 9월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고, 운전하다 체포된 여성에게 태형을 선고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대지진의 비극을 겪은 일본에서도 영웅은 탄생됐다. 이른바 '최후의 원전 결사대'이다.
이들은 지난 3월 12일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연쇄적으로 수소폭발을 일으켜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 자원해 원전에 남은 50인의 도쿄전력 작업반원들이었다. 사고 이후 원전 안에서는 800여명이 작업을 벌이고 있었으나 15일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며 상황이 급박해지자 도쿄전력측은 이들 자원자 50명만 남기고 전원 철수했다.
이들은 대부분 후쿠시마 원전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근로자들로, 몰래 짐을 챙겨나온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긴 "원전을 구하겠다"는 메시지 등이 알려지면서 세상을 감동시켰다. 이들은 최악의 상태를 막기 위해 전기도 끊어진 어둔 원전 안으로 들어가 원자로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증기를 빼고, 냉각수를 쏟아붓는 작업을 벌였다.
이들 50인의 사투가 알려지면서 원전으로 돌아가겠다는 자원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를 감동시킨 이들 결사대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앉아서 자는 등 열악한 상황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쿄전력과 무능한 정부을 향한 분노와 질타가 쏟아졌다.
'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 > 내가 본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비 아이샤와 무크타르 마이, '가문의 이름으로...명예살인' (2) | 2012.02.03 |
---|---|
초대형 유람선의 위험한 진실 (0) | 2012.01.16 |
유럽 극우주의 (0) | 2011.12.22 |
통합이냐 분열이냐..2011년 다사다난 유로존 (2) | 2011.12.14 |
확산되는 러시아 부정선거 시위사태 ..과연 제2 민주혁명될까? (0) | 2011.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