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국제법률회사에서 일하는 변호사 드미트리 라예프(29) 는 지난 10일 난생처음으로 거리 시위에 참가했다. 지난 4일 치러진 총선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부정행위와 개표조작을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푸틴 물러가라""우리는 공정한 개표를 원한다"란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벌이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처럼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12일 미국 공영방송 NPR과 인터뷰에서 " 변호사, 의사, 과학자 등 지식인 시위참가자들이 수천명은 돼보였다"고 말했다.
러시아 반정부시위사태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번 시위의 핵심세력이 되고 있는 중산층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NYT), 파이낸셜타임스(FT), 로이터통신 등은 시위현장에서 아이폰과 명품옷으로 치장한 청장년층 직장인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있다는 점이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벌어진 다른 시위들과 가장 크게 차별화되는 점이라고 보도했다. 골수 공산당원, 연금생활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주류였던 기존 시위현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없는 광경인 셈이다. 지난 10일 시위에서는 밍크 목도리와 선글래스를 쓴 채 시위를 벌이는 주부들도 어렵지않게 볼 수있다는 것이다.국제사회는 지금까지 정치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 중산층들이 이처럼 반정부 시위에 대거 참여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 중산층, 그들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높은 교육수준과 민주주의체제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이들 중산층은 러시아 정치사회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전문가들은 모스크바 경우 전체 인구의 약 40%,상트페테르부르크 등 기타 대도시 경우 인구의 20∼30%를 중산층으로 보고 있다. 지난 1991년 소비에트체제가 공식적으로 붕괴된 이후 약 10년간 러시아는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몸살을 앓았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쪽에는 신흥재벌(올리가르흐)가, 또 한쪽에는 소비에트체제때보다도 생활수준이 더 떨어진 대다수의 국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급등하는 석유수요로 러시아산 원유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마침 2000년 출범한 블라디미르 푸틴체제 하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식 경제정책에 힘입어 러시아 국민들은 오일머니의 돈벼락을 맞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푸틴이 대통령으로 재직한 2000∼2008년간 러시아 경제는 오일머니 덕분에 연 15% 씩 급성장했고, 이를 토대로 러시아 사회에서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러시아의 글로벌 연구소가 지난해에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1999∼2009년 간 중산층의 소득은 무려 142%나 증가했다. 조사결과, 자신을 '중산층'으로 응답한 사람은 약 48%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부분 높은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으며, 외국 여행 경험이 많고, 민주주의와 현대화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유, 법앞의 평등, 정치적 안정 등을 중시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푸틴 주요연표
1952년 10월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1975년 레닌그라드국립대 법학부 졸업
1985년 KGB요원으로 독일 드레스덴 파견 (->86년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본격화)
1990년 아나톨리 솝차크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보좌관 취임
19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 취임
19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제1부사장 취임
1996년 8월 보리스 옐친 대통령 총무실 부실장 임명
1997년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 실장 임명
1998년 7월 KGB 후신 FSB 국장취임
1999년 3월 국가안보회의 의장 취임
1999년 8월 총리 취임 (99년 12월 31일 옐친대통령 조기사임)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
2000년 3월 제3대 대통령 당선
2004년 5월 제4대 대통령 당선
2008년 5월 제10대 러시아 총리 취임
'푸틴체제'하에서 가장 많은 경제적 혜택을 입은 중산층은 지금까지 정치참여에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FT는 지난 12일자 기사에서 " 러시아에서 가장 교묘하게 잘 빠져나는 사회,경제그룹이었던 중산층이 드디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달라진 세태를 지적했다. 경제성장으로 형성된 중산층을 형성하면서, 이제는 높아진 정치의식으로 권력을 견제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 푸틴이 예상대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영구 집권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폭증했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대선 후 푸틴과 자리를 맞바꾸기로 한 사실이 드러나자 민의를 아랑곳않는 '밀실 야합정치'에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가뜩이나 타오르고 있던 불길에 부정선거가 결정적인 기름을 부은 셈이다. 에코모스크비 라디오의 정치해설가 빅토르 셴데크비치는 " 이번 시위는 경제와는 관계없는 명백히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면서 " 푸틴이 (대통령으로) 돌아온다는 말에 중산층들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중산층 시위가 과연 제2의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진정한 민주야당이 없는데다가, 중산층 시위참가자들이 제대로 조직화돼있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중산층 자체가 체제전복보다는 변화를 통한 개선을 선호한다는 한계도 있다.
실제로, 모스크바의 한 회사 간부는 FT와 인터뷰에서 " 우리는 혁명을 원치 않는다"며 "다만 우리의 표가 제대로 개표되기를 바라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권력에 도둑맞은 자신의 표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것이다. 35세 남성 직장인 역시 NYT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어떤 폭력도 원치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러시아의 잠자던 중산층이 드디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여년동안 크렘린이 러시아 국정을 좌지우지해왔다면,지금은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로 무장한 시민들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 러시아 코메르산트라디오의 정치평론가 콘스탄틴 폰 에게르트가 최근 BBC에 기고한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혼수상태라고 생각했던 살아있는 정치의 귀환"이 지금,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에 맞선 반정부 시위는 정치인, 영화감독, 인권운동가 등 다양한 반체제 인사들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 푸틴 체제하의 TV 선전과 경찰국가식 통제 속에서도 반체제 인사들은 곳곳에서 성장했는데 이들은 옛소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반체제 그룹부터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속에 등장한 파워 블로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푸틴체제하에서는 더이상 희망도 미래도 없다"는 이들은 공동적으로 '시민'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다.
러시아의 유일한 독립 선거 감시 기구 '골로스'의 릴리아 시바노바 대표는 최근의 러시아 정국을 만든 인물이다. 골로스는 선거직후 집권 통합러시아당의 선거법 위반 사례를 5000건 이상 공개하면서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보리스 넴쵸프(52), 미하일 카시아노프 (54)는 대표적 야권 정치인들이다.
반정부 단체 '단결'의 공동의장인 넴초프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출세가도를 달리다 부총리직을 마지막으로 물러난 뒤 야권인사로 돌아섰다. 그는 지난해 '푸틴 축출(Putin must go)'공동선언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동안 수차례 체포됐던 그는 이번 시위 과정에서도 체포돼 시위의 불길을 더 타오르게 했다. 카시아노프는 푸틴 대통령 당시 총리를 역임한 인물로 역시 2004년 해임된 후 강력한 푸틴 비판자로 선회했다. 2008년 대선 당시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출마 금지 명령을 받기도 했다.
한편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의해 주도된 이번 러시아 시위 과정에서 급부상한 인물은 변호사이자 파워 블로거인 알렉세이 나발니(35 . 사진)이다. 2008년 개설된 그의 블로그 방문객수는 6만여명, 트위터 팔로워는 11만 7000여명에 이른다. 이번 시위에서 그가 체포되자 오히려 그의 블로그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이 집결하며 시위대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권, 환경운동가등 광범위한 사회운동가 그룹도 러시아 반체제 그룹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그룹 인물로는 환경운동가 예브게니아 치리코바(33)와 류드밀라 알렉세예바(84)를 꼽을 수 있다. 알렉세예바는 옛소련시절 반체제 단체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의장으로 한때 푸틴 대통령의 인권 자문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곧 푸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존경받는 원로 반체제인사로 대접받고 있다. 반면 치리코바는 러시아 신세대 사회운동의 상징으로 2007년 소박하게 모스크바 교외 킴키숲 지키기 운동을 벌였다가 큰 호응을 받으며 환경운동가로 성장했다. 이후 그는 환경을 넘어 러시아 권력층과 대기업이 결탁된 부정부패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이와 함께 체스 월드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 TV 쇼 진행자인 마리아나 마크시모프스카야, 뉴스앵커인 레오니드 파르페노프, 풍자작가 빅토르 센데로비치 등 문화 예술 인사들도 반체제 그룹을 지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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