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강력추천! [토끼울타리]-호주의 추악한 역사를 폭로한다

bluefox61 2003. 10. 20. 14:53

호주가 요즘 한국인의 이민 희망국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호주가 악명높던 백호주의를 포기한 것이 불과 20여년전이다.
호주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 속의 유럽'을 표방하며, 백인우대정책과 
원주민 억압정책을 취했다. 이후 호주는 아시아 경제의 역동적인 성장 효과를 나눠갖기 위해, 
그리고 광활한 대륙을 더이상 소수의 백인인구만으론 개발할 수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때문에 
아시아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백인 기득권층이 저질렀던 
참혹한 인종차별정책은 아직도 호주 역사의 어두운 과거로 남아있다. 
가족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말살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못지 않게 참혹하기 이를데없다. 

필립 노이스 감독의 '토끼 울타리'는 호주의 백인들이 외면하고 싶어하는, 
그러나 절대 외면할 수없는 과거를 폭로하는 용기있는 영화다. 
지난해 호주에서 개봉됐을때 엄청난 센세이션과 함께 
'호주영화가 나갈 길과 희망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단의 호평을 한몸에 받았던 
화제작이기도 하다. 
필립 노이스는 호주 출신으로 , 할리우드로 건너가서 '본 콜렉터'등의 블럭버스터급 오락물을 
만들기도 했던 재간꾼.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주문생산에 따라 미국 관객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연출했던 감독이 고국으로 돌아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 

영화의 줄거리는 실화소재답게 매우 간결하면서도 , 강렬하다. 
시대 배경은 1930년대. 당시 호주 정부는 원주민에 대한 일종의 강제 백인화 정책에 따라, 
모든 원주민 및 혼혈아들을 강제 수용해 백인남자와 성관계를 갖도록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몇대에 걸쳐 피를 섞다보면, 원주민을 백인으로 만들 수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호주식 '피가름'이다. 
문제는 당시 백인들은 이같은 비인도적인 정책이 원주민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원주민관리국의 네빌 국장(케네스 브래너) 은 원주민들을 무지와 가난에서 구원하는 방법은 그들을 백인으로 만드는 것이란 신념의 소유자이다. 

이 정책에 따라 14살부터 10살도 채 되지 않은 혼혈소녀 3명이 
엄마와 강제로 떨어져 낯선 수용소에 잡혀온다. 
수용소의 분위기는 '제인에어'의 기숙학교와 비슷하다. 
새옷을 입고, 교양있는 영어만 쓰도록 교육을 받지만, 
도망치는 아이는 이내 잡혀와 매질과 독방수감 처벌을 받아야한다. 

몰리, 데이지, 그레이시는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살수없다는 판단에 따라 
어느 비오는 날 밤 수용소를 탈출한다. 
빗줄기는 이들의 발자국을 지워준다. 몰리는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맨땅대신 
시냇물 한가운데로 걸어가거나 돌맹이만 밟고 걷는 영특함을 발휘한다. 
그리고 토끼울타리만 따라가면 엄마가 살고있는 고향으로 갈수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세명의 소녀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대장정을 향해 무작정 걸음을 내딛는다. 

고향까지 2200km. 서울- 부산을 5번쯤 왔다갔다하는 엄청난 거리다. 
그러나 세명의 소녀(그레이시는 중간에 가짜 소문에 속아 두 친구와 헤어졌다 
추적꾼들에게 잡힌다) 는 엄마를 만나야한다는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 
광활한 사막과 황야를 오로지 두 발로 걷고 또 걷는다. 
수천 킬로나 떨어진 몰리 모녀가 토끼울타리의 철망을 잡고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 가장 감동적인 부분. 엔딩 부분에서는  할머니가 된 진짜 몰리와 데이지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저려오는 아픔을 느끼게 된다.

노이스 감독과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은 
일체의 영화적 기교나 극적 장식들을 일체 배제함으로써 
실화가 가진 순수한 힘을 전달하고 있다. 
한 인종을 말살하려는 간악한 정책을 고발하면서도 
그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은 점도 돋보인다. 

(스포일러; 몰리는 집에 무사히 돌아온후 숨어살면서 원주민 남자와 결혼해 아이도 낳았지만 
다시 수용소로 잡혀갔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다시 탈출해 고향땅으로 걸어서 돌아왔지만, 
수용소에서 아이까지 데리고 나오지는 못하는 바람에 수십년동안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답니다. 이 영화는 몰리의 딸이 어머니의 일을 기록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