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굿바이 레닌'-무조건 보십시오 ^^

bluefox61 2003. 10. 27. 14:55

독일 통일 꼭 10년째인 지난 2000년 베를린을 찾았을 때, 현지 사람들로부터 유난히 많이 듣었던 말 중 하나가 바로 '추하다(ugly)'란 단어였다. 동베를린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더 광장 근처를 걸으면서, 그들은 주변에 늘어선 거대한 회색빛 상자곽같은 낡은 빌딩들을 가르키며 '추하다'고 불평했다. 한때 동독의 자랑거리였던 자동차 트라반은 웃음거리가 된지 이미 오래였고, 베를린 동쪽 거리 곳곳에 남아있던 동독 시절의 촌스런 신호등들은 하루속히 철거되어야할 흉물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세련된 서 베를린 사람들이 동 베를린 구역에서 그나마 마음에 들어하는 곳은 브란덴부르크문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뻗은 운터 덴 린덴 뒷편의 고색창연한 건물과 좁다란 골목길들이었다. 나를 안내했던 한 독일사람은 ″분위기있게 식사하기에는 이곳이 최고″라고 말했다. 
듣고보니 괴테와 훔볼트가 걸었을 법한 골목길의 옛 건물들 중 근사한 실내장식의 레스토랑으로 바뀐 곳이 유난히 많았다. 게중에는 통일 후 망했는지는 문을 굳게 걸어잠근 상점들도 눈에 띄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서쪽의 자본이 동쪽 토박이들을 밀어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생활의 터전이었던 상점을 서쪽 자본가들에게 내줘야만 했던 옛 동베를린 사람들을 지금쯤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동안 자본주의에 적응하는데 성공했을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 대부분이 600만명이 넘는 다른 독일인들과 함께 영화 '굿바이 레닌'을 관람하며 웃고 울었으리란 사실이다. 
올해 초 독일서 개봉돼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볼프강 베커 감독의 '굿바이 레닌'이 아직도 독일에서 만만치않은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다. 이 영화 때문에 난데없이 독일에서는 구동독시절 물건 수집 바람이 불었고, 유행가부터 패션에 이르기까지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그 덕분에 독일어로'동쪽'을 뜻하는 '오스트'와 '향수'란 의미의 노스탈자를 합친 '오스탈자'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베를린 시장은 얼마전 통독 기념식에서 ″지나친 오스탈자가 동독 체제를 컬트화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기까지 했었다. 

89년, 낡은 정치 체제와 권력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동베를린 청년 알렉스는 어느날 시위에 휩쓸렸다가 체포당하게 되고, 마침 시위 현장을 지나다가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 크리스티아네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8개월만에 겨우 의식을 되찾은 어머니가 충격으로 다시 쓰러지지 않도록 알렉스는 희대의 거짓말을 시작한다. 장벽을 넘어 서쪽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동베를린사람들은 알렉스에 의해 ″신나치당이 장악한 자본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껴 동쪽으로 너머온 난민들″로 뒤바뀌고, 도시 곳곳에 세워진 코카콜라 간판은 코카콜라가 동독의 발명품이란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상표권이 고향을 돌아왔기 때문으로 변명된다. 예전부터 즐겨먹던 동독산 오이피클을 먹고 싶어하는 어머니를 위해 아들은 쓰레기통에서 동독 상표가 붙은 빈 병을 찾아다가 서독 피클로 알맹이를 채워 식탁에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영화감독지망생인 친구의 도움을 빌려 동독이 아니라 서독이 망했다는 가짜 TV뉴스까지 제작하게 된다.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아들 알렉스의 거짓말 소동은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어린 아들을 위해 유대인 학살을 게임으로 바꿔보려는 아버지의 몸부림만큼이나 눈물겹다. 아직도 동독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알렉스와 어머니의 작은 아파트는 통일후 어지럽게 변화하는 혼란스런 세상과 단절된 평화로운 낙원이다. 알렉스가 거짓말로 꾸며낸 가짜 세상은 결국 10여년전 모든 독일인들이 꿈꾸었던 통일된 조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600만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굿바이 레닌'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갔고, 오스탈자가 전국적인 신드롬으로 번지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분명 동 ,서독 구분없이 모든 독일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통일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10년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되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됐다고 할까. 동독출신들은 자본주의체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서독처럼 잘 살수 있게되리란 과거의 희망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현실, 자유는 얻었지만 서로를 아끼며 돌보는 인간미는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데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서독 출신들도 통일만 되면 독일이 세계최고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리라고 기대했겠지만, 예상보다 큰 통일비용과 실업률 증가 등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오고 있기도 하다. 

독일국민들에게 통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굿바이 레닌'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제는 택시운전사로 몰락한 우주 영웅 지그문트 얀의 입을 통해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알렉스에 의해 난데없이 가짜 통독 대통령으로 임명된 얀은 마이크 앞에 앉아 국민들에게 이렇게 연설한다(사실은 알렉스의 어머니를 위한 가짜 연설이지만). 
″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 얼마나 의미없고 하찮은가를 절감하게 되지요. 그래서 전 새 대통령으로서 베를린 장벽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 

정말 그렇다. 우주를 비행하면서 자연과 절대자의 위대한 힘을 온몸으로 체험한다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온갖 장벽(예를 들어 남과 북을 가른 휴전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세운 안전벽 등등),이데올로기들, 국경선 따위가 모두 부질없게 느껴지지 않을까. 
결국 알렉스가 원했던 , 그리고 모든 독일인이 원했던 통일된 조국의 모습은 물질주의보다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있는 사회 ,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접받는 사회이다. 현재의 독일은 과연 이런 모습에 얼마나 가까울까. 

'굿바이 레닌'이 던지는 이 통렬한 질문은  '부질없는' 분단의 상흔을 끌어앉고 사는 한국사람들, 그리고 언젠간 이루어질 통일을 꿈꾸는 이 땅의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도 절절하게 파고 든다. 쇠고랑 찬 송두율의 모습을 보아야하는 지금,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