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에바디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이란영화를 생각하다

bluefox61 2003. 10. 15. 14:54

이란의 여성운동가이자 인권변호사인 시린 에바디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14일 금의환향, 테헤란 국제공항에서 3천명의 환영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죠 
에바디의 노벨상 수상으로 이란의 보-혁 갈등은 더욱 노골화되고 가열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가 만난 이란 사람이라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단 두사람뿐입니다. 
키아로스타미와는 대화도 나눴는데, 부산영화제의 추억으로 밤에 포장마차를 순례했던 것을 
꼽더군요.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선 술을 마시지 않지만, 김동호 위원장과 함께 거나하게 
술에 취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랍니다. 
마흐말바프는 직접 대화한 것은 아니고, 공식 기자회견에서만 봤는데 
옆집 아저씨처럼 참 소박해보이더군요. 
올 부산영화제에서는 허름한 골목길을 막내딸 하나와 천천히 걸으면서 
이 가게 저 가게 구경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죠. 

시린 에바디의 노벨 평화상 수상 뉴스를 접하면서 
새삼 이란 영화, 특히 검열의 굴레 속에서도 꾸준히 '양심'을 이야기하는 
이란의 많은 영화작가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란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후 소개된 '올리브 나무 사이로'나 '체리향기' 를 비롯해 
자파르 파나히의 '하얀 풍선 ', 마지드 마지디의 ' 천국의 아이들' 등의 작품은 
순박한 이란사람들, 특히 천사같이 아름다운 아이들의 세계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이란에서 이런 영화가 많은 것은 할리우드식 상업영화와 달리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이란 특유의 영화 미학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엄격한 검열제도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이란 영화에는 남녀가 키스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치부를 건드리는 소재는 
절대 등장하지 못하도록 돼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란 감독들이 정부나 교계에서 지시하는대로 고분고분 천사같은 영화만 만드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이란 감독들은 중동 지역의 어떤 나라에서 보다도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과감히 고발한 작품들을 만들어오고 있지요. 
최근엔 아프가니스탄의 인권 탄압, 그리고 전쟁 이후의 참화 등에 관해 
중동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문제작들을 많이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온가족이 감독인 마흐말바프 집안의 아버지 모흐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 구호를 위해 사재를 털기도 하고 
젊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을 독려해 영화를 만들도록 도와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선보인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장편영화 
'오사마'죠. 

올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자파르 파나히의 '붉은 황금 (Crimson Gold)'는 
이란 영화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권총강도와 자살, 욕설, 그리고 극심한 빈부격차, 
삶의 지향점을 잃은 젊은이들의 상실감 등을 매우 직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른 아침 테헤란의 한 고급 보석상에 한 젊은이가 권총을 들고 
침입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남자는 주인을 위협하며 보석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주인이 보안경보를 누르는 바람에 셔터가 내려지고 , 도망칠 기회마저 놓치게 되죠. 
이렇게 되자 젊은이는 아무 표정없이 주저 앉아있다가 
권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쏴버립니다. 

순박하게 보이는 이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무엇이 그를 강도로 돌변하게 만들었을까요? 

감독은 시점을 과거로 돌려, 이란-이라크전 참전용사 출신인 이 후세인이란 남자가 
피자배달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사회의 모순, 출구없는 절망감 등을 되짚어나갑니다. 
그의 눈에 비친 테헤란은 밤마다 도시 어디에선가 경찰들에 의한 감시와 체포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어떤 집에 모여 술마시고 춤추며 파티를 벌였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하죠)가 벌어지고, 극빈자(피자 배달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동료의 운동화를 
걸인이 벗겨가는 장면)와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가 공존하는 그런 이상한 곳입니다. 
군대시절 동료들로부터 '천사'란 소리까지 들었던 후세인은 
약혼자에게 예물을 사주러 들어갔던 보석상 주인으로부터 
시장 금은방에나 가보라는 소리를 듣고 난후, 
결국 그 보석상을 털기 위해 강도로 변하고 말죠. 

자파르 파나히는 '서클'이란 작품에서도 이란 여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도 같은 이란 사회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매춘까지 거론하고 있죠. 
'서클'은 아직도 이란에선 상영금지 목록에 올라있다고 합니다. 
이로서 이란 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된 파나히는 '붉은 황금'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고초를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된 바박 파야미의 '두개의 생각 사이의 침묵'은 
여죄수를 강간하란 명령을 받고 고민하는 탈레반 병사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처녀로 죽은 여자는 천당에 간다는 믿음이 있다는데, 
영혼마저 천당에 못가도록 강간을 명령하는 종교의 무지몽매함과 
비인간성을 고발합니다. 파야미는 '비밀투표'로 국내 관객에게도 꽤 알려진 감독으로 
'두개의 생각...'이 이란 정부에 의해 해외반출 금지 처분을 받자 
필름대신 몰래 떠놓은 디지털 비디오를 베니스 조직위에 보내야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죠. 

'가베'란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마흐말바프는 
최근 '칸다하르 '를 내놓았고, 키아로스타미도 최근작 '10'에서 
이란 중산층 여성을 통해 붕괴된 중산층 가정의 단면을 예리하게 고발합니다. 
'천국의 아이들'의 마지드 마지디 역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아, 
카메라를 들고 난민촌에 뛰어들어 '맨발로 헤라트까지'란 다큐멘터리를 찍었구요. 
이 작품은 올해 부산에서 소개됐습니다.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이지만, 영국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의 '인 디스 월드'(올 부산에서 상영됐고 
지난 봄 베를린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를 보면 
중동지역에서 그래도 이란은 꽤 안정되고 ,다른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개방된 듯보입니다. 
이 영화는 아프간 난민 소년 2명이 국경지역의 난민촌을 떠나 파키스탄-이란을 거쳐 
영국으로 오는 참혹한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치열한 내부 성찰을 담은 이란 감독들의 작품들을 보면, 
70년대, 80년대 군부독재시절의 우리나라 감독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시대의 양심을 담아내려는 감독들이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전성기란 꽃을 피워냈다고 생각합니다. 
용기있는 이란 감독들에게 유난히 연대감과 친숙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런 우리와의 역사적 공통점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