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라스트 사무라이]-오리엔털리즘과 후까시즘의 결합

bluefox61 2004. 1. 7. 15:01

'라스트 사무라이'의 에드워드 즈윅 감독만큼 미국 영화계에서 영웅주의에 탐닉해온 감독도 드믈다. 
그런데 즈윅 영화의 영웅주의는 여타의 할리우드 영웅담과는 조금 다른 색깔을 띤다. 한마디로 수정주의적 영웅주의라고나 할까. 그는 현실 속에서 영웅과 애국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미묘해질 수있는가를 이해하는 감독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걸프전 당시 사망한 여성장교의 진실을 파헤치는'커리지 언더 파이어', 남북전쟁당시 흑인으로만 구성된 북군을 소재로 한 '글로리', 아랍 테러로 인해 미국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상황을 다룬 '비상계엄' 등이 꼽힌다. 이 세 작품은 모두다 무엇이 진짜 애국이며 , 진짜애국자는 과연 누군가란 문제를 제기하고있다. 

즈윅의 시선은 무작정 미국 우월주의를 부르짓는 행위가 자유민주주의 보루로서 미국을 훼손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영웅과 애국, 정의와 도의에 대한 찬미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묘하게 복고적이며 보수적이다. 그의 대표작인 '가을의 전설'도 정부의 인디언 정책에 환멸을 느끼는 아버지 윌리엄 러드로우대령과 1차세계대전 후 방황하는 둘째 아들 트리스탄을 통해 현대문명, 그리고 미국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면서도 , 결국에는 개척시대의 고독하고 낭만적인 영웅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영화들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가을의 전설'의 캐릭터와 설정을 그대로 19세기 일본으로 옮겨왔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유사한 점이 많은 영화다.
'라스트 사무라이' 알그렌과 '가을의 전설'의 트리스탄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근대 기술문명의 폭력성에 환멸을 느낀 인물이다. 한명은 인디언 학살에, 다른 한명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두 사람은 모두 비 미국적인 문화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데,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 전통 사무라이 문화, '가을의 전설'은 인디언 문화(또는 인디언 혼혈 여성)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라스트 사무라이'가 '가을의 전설'의 장단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가을의 전설'이 미국 서부의 광활한 자연을 아름답게 담아냈던 것처럼, '라스트 사무라이' 역시 사무라이들이 숨어사는 산골마을의 정겨운 정취, 기모노와 일본 전통가옥의 단아한 멋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한자루의 칼에 자신의 목숨을 건 사무라이들이 처절한 싸움은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아시아를 신기하고도 매력적인 땅으로 바라보는 이방인 시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의와 신의를 대표하는 사무라이들은 너그럽고 평화로우며 용기있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비해, 서구화를 주도하는 일본의 관료는 부패하고 비겁하게 묘사되고 있는 점이 대표적인 부분이다. 일본여성은 무조건 집안 어른의 말에 복종하며, 남자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치는 (영화에서 일본 여성 타카는 남편을 죽인 원수인 알그렌이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로 거듭나려고 애쓰는모습을 보면서 연모의 감정을 품게되며, 심지어는 전투에 떠나기전 알그렌에게 죽은 남편의 갑옷을 직접 입혀주기 까지 한다)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일본에 대한 서양의 상투적인 이미지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전쟁에서 진 가스모토가 명예를 지키기위해 할복자살하자, 천황측 군대 병사들이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는 그 상투성과 후까시즘! 

'라스트 사무라이'는 사무라이에 대한 미국인들의 고정관념, 즉 오리엔털리즘의 전형적인 시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전쟁의 참혹성에 치를 떨었던 알그렌이 아무리 사무라이에게서 잃어버렸던 도의와 신의의 정신을 되찾았다지만 ,일본이란 이국 땅에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천황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칼을 든다는 설정도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같다. 

결국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 문화에 대해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묘한 동경심을 반영한 영화라고 할 수있다. 그것은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남자다움'이 아닐까 싶다. 다시말해 남자다움의 덕목으로 꼽히는 명예와 의리, 지도자와 부하들간의 끈끈한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따라서 현대문명의 잔혹성에 대한 알그렌의 고뇌에서 진정성을 느끼기 힘들며, 심지어는 그것이 주인공을 멋있게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