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실미도]-단점을 덮는 실화의 힘

bluefox61 2004. 1. 16. 15:01

강우석 감독은 비즈니스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판단이 빠른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다. 
한마디로, 될 성 싶은 것과 안될 것, 힘을 실어야할 곳과 힘빼고 쉬어가도 될 곳을 
결정하는데 누구보다 빠른 감각의 소유자란 이야기다.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연일 갈아치우며 전국 600만명의 고지를 향해 
쾌속 순항 중인 [실미도]는 강우석의 그런 동물적 판단력 , 또는 영화적 본능을 
새삼 증명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 , 감독이 어느곳에 힘을 주려 했는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관객의 감정을 정확하게 짚어 자극하려는 이런 계산은 
때론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없는 것은, 
그 효과가 실제 대단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미도]에서 
연좌제에 걸려 사람취급못받았던 훈련병 강인찬(설경구)이 
유일하게 사랑해온 어머니의 낡은 사진을 빼앗기고 절규하는 장면, 
또는 이름없는 훈련병들이 군경과 대치한 상황에서 
버스 벽에 자신의 이름을 피로 적어 남기는 장면, 
냉철한 조중사가 훈련병들을 구하기 위해 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봉지에서 사탕이 흩어지는 장면 등은 
매우 도식적인 연출수법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거부감과 저항을 무장해제하고
가슴을 아프게 자극하는 힘이 있다. 

사실 [실미도]는  헛점이 많은 영화라고 할 수있다. 
예를 들어, [실미도]는 비슷한 정치적 소재의 영화인 [공동경비구역 JSA]가 미스터리 수법으로 
사건을 풀어나간 것과 같은 스타일상의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조금더 전문적으로 보자면, 컷의 나눔(도입부에서 김진조의 서울 침투와 강인찬이 상대조폭 약혼식장으로 치고들어가는 장면의 단순함)이라든가 빛의 이용(실미도에서의 수중훈련 장면의 흐릿한 화면), 카메라의 움직임 등의 면에서도 
이 영화는 거의 특별한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들어 박찬욱, 봉준호 등 일련의 감독들이 매우 세련된 영상을 선보이고 있는 것과 
비교해볼때 [실미도]는 심지어 오래전에 만들어진 방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영화관과 담쌓고 지냈던 중장년 남성을 끌어당기며 전국 약 6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은 절대적으로 실화의 힘에 있다. 
강우석 감독이 노린 것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그는 어떤 영화적 기교로도 능가할 수없는 실화의 비극적 힘을 살리기 위해 
매우 정공법적(예를 들어 선과 악의 캐릭터를 명확하게 구분한 것, 마초적 에너지 또는 동지애 따위 등을 강조한 점 등)인 연출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허다한 단점을 덮어버릴 만큼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