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이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젤라토(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를 맛있게 먹었던 스페인광장 계단에서 최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보석 브랜드 불가리가 스페인 광장 계단 보존프로젝트를 위해 200만 달러(약 21억 5000만 원)를 로마 시에 기증하는 기념식이 개최된 것. 장 크리스토프 바벵 대표는 " 스페인광장 계단은 이터널 시티('영원의 도시'란 의미로 로마의 별명) 의 건축보석"이라며, 18세기초 건립된 이 계단을 보다 아름답게 보존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거액을 내놓는 의미를 밝혔다. 올해로 창업 130주년을 맞은 불가리는 현재 프랑스의 LVMH(루이 비통 모에 헤네시)에 인수된 상태이지만, 스페인 광장 계단 보존을 지원함으로써 자사의 뿌리가 로마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분명하게 보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들이 문화재 지킴이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패션과 문화재의 아름다운 콜라보레이션(협업)이다. 지난 2010년 토즈가 로마의 콜롯세움 보수·복원을 위해 3360만 달러(약 361억 3000만 원)를 내놓은데 이어 프리미엄진 브랜드 디젤이 베네치아의 유서깊은 리알토 다리를 위해 673만 달러(약 72억 4000만 원),펜디는 트레비 분수 복원에 293만 달러(약 31억 5000만 원)를 쾌척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후원해오고 있는 프라다는 베네치아에 현대미술 전시장을 세우고 있고, 구찌는 오래된 영화 필름 복원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이 밖에 라우라 비아조티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 계단 보존을 위해 약27만 6000달러(약 3억 원)를 내놓아 화제가 됐다.
적자재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는 정부는 이탈리아의 미와 창조정신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들이 문화재 보존과 복원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호소하고 있다. 올해 이탈리아 문화 예산은 전년보다 약 1억 유로가 줄어든 14억 유로 수준이다. 문화예산이 해마다 줄어들면서, 문화재 관리가 소홀해졌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마테오 렌치 총리는 " 전국의 문화재 보호를 위해 기업과 개인 투자가들의 지원이 시급하다"며 SOS를 보냈다. 특히 정부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관리부실과 악천후 때문에 급속히 파괴되고 있는 폼페이 유적지이다. 예산부족으로 관리인력이 대폭 줄어들면서, 최근에는 폼페이 유적지에서 벽화가 통째로 도난 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폼페이 보존 지원을 위해 나선 기업은 아직 없지만, 정부는 이번에도 패션 브랜드들이 총대를 메주길 기대하는 눈치이다. 로마 시는 로마제국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영묘 복원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는 아우구스투스 탄생 20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로마 초대 황제 가족이 잠들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 영묘는 관광객들이 찾아가기 쉽지 않고 사실상 방치돼있다시피 한 상태이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들이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돈을 내놓는 것은, 그만큼 자국 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토즈의 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 인 렌조 루소는 지난해 말 콜롯세움 복원 프로젝트 개시 행사에 참석해 " 우리는 이탈리아 라이프스타일, 문화, 미의 DNA(디옥시리보핵산)를 지닌 상품을 만들어내는 회사"라며 " 역사와 문화는 어떤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콜롯세움 복원이 이탈리아의 다른 문화재 복원의 모델이 되길 바란다"고 밝히기도 했다.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콜롯세움의 복원작업은 총 3년이 걸리는 프로젝트로, 균열을 메우고 그을음을 벗겨내는 것뿐만 아니라 소실된 내부 구조와 지하시설들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방대한 규모이다. 토즈는 화재로 크게 훼손된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 복원을 위해서도 많은 돈을 내놓은 적이 있다.
펜디가 293만 달러를 지원한 트레비 분수 복원은 올해부터 시작해 약 20개월 쯤 걸릴 예정이다.트레비 분수는 관광객들이 동전을 던져 넣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걸작 '라 돌체 비타'에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이탈리아적 감성과 아름다움의 상징이 된 곳이기도 하다. 펜디는 트레비 이외에도 로마 시내 분수 4개의 보존 ·복원도 지원하고 있다. 창업자의 손녀인 실비아 베튜리니 펜디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 로마는 펜디 창조유산의 일부"라고 말했다. 펜디의 크리에티브디렉터인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트레비 복원에 맞춰 최근 로마 시내 곳곳을 돌며 직접 찍은 분수 사진집 '글로리 오브 워터'를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패션 브랜드들은 문화재 복원을 지원함으로써 돈으로 따질 수없는 홍보효과를 올리고 있다. 콜롯세움 전면에는 복원이 진행되는 3년동안 토즈의 로고가 들어간 초대형 현수막이 내걸리고, 입장권에도 토즈의 로고가 들어간다. 정부와 각 시는 국민 혈세를 쓰지 않고도 관광수익과 직결된 문화재 복원을 할 수 있어서 좋고 , 각 브랜드들은 명분과 홍보효과를 동시에 챙길 수 있어서 좋은 '윈윈 콜라보레이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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