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의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 영조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속 ‘야동순재’를 한 인물로 상상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연기자 이순재(74·사진)씨라면 가능한 일이다. 데뷔한 지 올해로 53년. 텔레비전, 영화, 연극 무대를 가리지 않고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그다.
1990년대 초·중반 국회의원으로 잠시 ‘외도’ 한 적이 있지만, 그때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는 않았다. 최근 그는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선정한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는 명예를 안기도 했다.
“예술은 종착점도 없고 완성도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예술가에게는 매일 새롭게 창조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이 길에는 끝이 없구나’ 절감하곤 해요. 늘 열심히 노력해서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할 뿐이죠. 제일 경계하는 것은 매너리즘입니다. 2006년에 이어 지난해에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주연을 맡아 모처럼 멜로 연기를 했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같은 작품이나 비슷한 작품을 또 하라고 하면 모르겠습니다. 요즘엔 명동예술극장에 다시 서서 연극을 해보고픈 꿈을 가지고 있어요. 고향 같은 곳인 만큼 애정과 기대가 각별합니다.”
지난 20일 서울 중랑구청 내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원로 연기자 이순재씨는 기자와 마주 앉자마자 연기에 대한 열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그의 이야기는 고전(古典)에 대한 지극한 사랑부터 기본조차 돼 있지 않은 아이들 스타에 대한 신랄한 비판, 돈벌이에만 급급한 방송사의 행태, 최근 종영된 ‘꽃보다 남자’와 시청률 1위 드라마 ‘아내의 유혹’ 등 이른바 ‘막장 드라마’의 사회적 해독론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하이킥’ 덕분에 한참 손자뻘인 초등, 중등생 팬들의 전화를 받곤 하는 이순재씨의 하루는 요즘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였던 중랑구의 사회복지협의회 업무를 위해 거의 매일 출근하고 있고 TV 드라마와 영화, 라디오 출연 일정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데다, 11년째 몸담고 있는 세종대 학기 중에는 매일 오후 7시부터 4시간 동안 영화예술학과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을 위한 연기 워크숍을 이끌고 있다. 젊은 사람들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노동량이다. 그 많은 일을 소화하는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물었더니, 지난해 95세로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유전자’와 술을 멀리하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라고 말했다.
“술 좋아하던 친구들은 전부 먼저 갔어요. 김동훈, 김순철 등등…. 운동 좀 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전 젊어서부터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어요. 소주 3잔 정도면 끝이지요. 연기는 함께하는 작업이에요. 나이가 많다고 먼저 배려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어요. 촬영 현장을 지키기 위한 체력관리는 연기자로서 기본이에요.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을 찍었는데 내리 12시간 촬영했고, ‘이산’ 때는 초반부에 영조 비중이 커서 24시간 동안 촬영한 적도 있었지요. 그때는 좀 힘들더군요(웃음). ”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처음 이름을 올린 연기자로서, 그는 ‘기본’보다 ‘재주’와 ‘외모’로 벼락스타가 탄생되는 요즘 방송 풍토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세종대에서 제 워크숍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1학기 동안 한 작품만을 가지고 학생들이 연습을 계속하는 거죠. 이번 학기는 존 오스본의 걸작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텍스트예요. 매일 저녁마다 연습하면서 학생들이 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느끼는 것 같더군요. 이런 식으로 지난 6~7년간 워크숍을 이끌어왔는데, 확실히 학생들의 연기력이 좋아지고 있어요. 배우는 허구를 연기하지만, 연기 그 자체는 허구가 아닙니다. 철저한 연습, 인문적 지식과 이해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게 바로 연기예요.”
그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 연기 연습보다는 노래와 춤부터 배우는 세태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발성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정체불명의 연기자들이 넘쳐나는 데에는 학교 교육부터 방송사, 기획사,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참 대단한 후배 연기자들도 있어요. ‘베토벤 바이러스’를 함께한 김명민이 그렇지요. 연기 설정이 정확하고, 준비가 철저한 데다, NG가 거의 없더군요. 반면 촬영 중 제가 어린 배우 한 사람에게 크게 화를 낸 적도 있었어요. 쟁쟁한 선배들이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데, 그 배우는 자주 늦는 데다가 자기 순서가 아니면 촬영장 한구석에서 잠을 자곤 하는 겁니다. 건방을 떠는 거죠. 연기란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이 판단해야 하는 힘든 일인데, 거기에 무슨 폼 따위가 필요하겠습니까.”
화살은 급기야 ‘꽃보다 남자’에까지 미쳤다. “꽃미남들을 스타로 신분 상승시키는 데 기여한 드라마”라고 비판한 그는 “정작 스토리로 감동받은 시청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드라마가 재미 자체를 가치로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사회병리현상, 해악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 방송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들에 대해서도 아쉬운 게 많습니다. 예전엔 방송 시나리오 작가 대부분이 문학과 연극 분야에서 활동하던 분들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엔 작가와 방송사 모두 시청률 올리기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김수현씨 같은 분이 참 드물지요. ‘엄마가 뿔났다’ 같은 작품엔 주부들이 갖고 있는 고민과 중압감, 가족의 몰이해로 인한 허탈감, 카타르시스, 노령화 사회의 문제점 등등이 모두 녹아 있거든요.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이젠 우리도 가까운 일본처럼 드라마 사전제작을 하자고 말하지만 소용이 없어요. 전 세계에서 우리처럼 한 드라마를 일주일에 두 편 제작해 방송하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배용준 드라마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한류바람을 일으킨 건 어쩌면 그만큼 한국 드라마에 대한 그들의 기대감이 낮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순재씨는 요즘 또 한번의 변신을 준비 중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김병욱 PD와 다시 한번 손잡고 ‘시즌2’에 출연하기로 확정지은 것. 구체적인 방송 스케줄은 물론이고 제목조차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는 빠르면 올해 안에 시청자들을 찾아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시즌1 때 캐릭터가 이어질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반복’과 ‘매너리즘’을 경계하는 그가 시트콤 재도전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경제난으로 어려운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방송의 첫 번째 기능이 공익성이라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에게 즐거움과 웃음거리를 주는 데 시트콤이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킥’출연 당시 가장 감동했던 게 백혈병 환자 관련 단체 회원들과 만났을 때였습니다. 백혈병 환자를 자녀로 둔 어머니들이었는데, 정신적·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제게 ‘하이킥’을 볼 때 아이와 함께 웃는다면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그때 방송 드라마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지요. 경제적 어려움으로 웃을 일 없는 국민들을 즐겁게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리얼리티가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시트콤으로 시청자들을 찾아갈 겁니다.”
문화부장 aeri@munhwa.com
■ 이순재씨는…
▲1935년 함북 회령 출생 ▲1953년 서울고 졸업 ▲1958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 TV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연기자 데뷔 ▲1971년 초대, 72년 2대, 78년 12대 한국방송연기자 협회장 ▲1992년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중랑갑) ▲1995년 한·일의원연맹 간사 ▲1998년~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석좌교수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최우수연기상, 2002년 보관문화훈장, 2007년 방송연예대상, 2008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선정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등재
▲대표작 : TV 드라마 ‘대원군’ ‘사랑이 뭐길래’ ‘허준’ ‘상도’ ‘토지’ ‘이산’ ‘거침없이 하이킥’‘엄마가 뿔났다’‘ 베토벤 바이러스’ 등. 영화 ‘밤은 말이 없다’(1965년) ‘막차로 온 손님들’(1969년) ‘분례기’(1971년) ‘비목’(1978년) ‘사람의 아들’(1980년) 등 100여편.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바냐 아저씨’ ‘늙은 부부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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