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지구촌 전망대

그리스에서 본 한국

bluefox61 2015. 7. 24. 05:42

젊은 시절에는그리스의 국민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와 비슷했을 것만 같은 외모를 가진 70대의 마리아 할머니는 머나먼 한국에서 찾아온 낯선 여기자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격한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그의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그리스 국민투표를 앞두고 찾은 현지에서 만난 수 많은 아테네 시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바로 마리아 할머니이다. 그를 만난 곳은 아테네에서 가장 유명한 육류·생선 전통시장인 플라카 시장의 한 생선가게였다. 커다란 칼로 생선을 다듬고 있던 30대 청년 상인을 인터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할머니 한 분이 목소리를 높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건 다 유대인들 때문"이라며 청년이 좌충우돌식 화풀이 발언을 한 게 그의 귀에 딱 걸려들었던 모양이다. 


마리아 할머니는 "나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인종차별만은 절대 안된다"며 자신보다 몸집이 세배쯤 큰 청년을 거침없이 꾸짖었다. 그 바람에 주변 상인들과 손님들 간에 격한 말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고,시장은 삽시간에 고대 아고라 못지않은 정치토론장이 돼버렸다. 그 틈을 타 시장 입구로 마리아 할머니를 모시고 나와 몇마디 건넸다. 인종차별만은 결코 용납해선 안된다고 주장할 만큼 이성적이고 지성적이었던 그는 "항상 국민들이 (권력자들에게) ‘예스’만 하다가 따귀를 맞았다"며 "우리(그리스 국민)는 존중을 원하기 때문에 ‘오히(oxi: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독일 등 유로존 각국의 압력에 백기투항하고 3차 구제금융의 혹독한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 위기는 한 고비 넘기게 됐지만, 지난 5일 국민투표에서 그리스 국민들이 도대체 왜 ‘오히’를 택했는지를 놓고 아직도 다양한 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고대부터 이어져내려오는 뿌리깊은 저항의식을 꼽았다. 1940년 항복을 요구하던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재정권에 ‘오히’를 외쳤다가 이탈리아와 독일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엔 그들을 물리쳤던게 바로 그리스 국민들의 저력이자 기질이란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만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오히’의 이유는 바로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이었다. 제 이익과 배를 채우는데 더 급급했던 기성 정치권력 때문에 민주주의의 산실인 위대한 국가 그리스가 지금의 치욕스런 상태로 몰락하고 말았다는 울분으로 그들은 들끓고 있었다.우파냐, 좌파냐의 구분은 필요없었다. 실제로 그리스의 부호와 권력층의 탈세 문화는 유럽 내에서도 악명이 높다. 1996년 세상을 떠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가 36세 연하의 세번째 아내였던 디미트라 리아니에게 온갖 호화찬란한 사치품을 안겨줬던 이야기만 나오면 아테네 시민들은 지금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 정치인들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것은 국민의 책임 아니냐"는 질문을 눈치없이 던졌다가 분위기가 잠시 험악해질뻔하기도 했다. 지난 수십년동안 권력과 부를 누려온 기득권 층, 특히 정치인들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해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국민들에게 이성과 합리의 호소가 통할리가 없었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으면, 올바른 리더십이 사라지고 없을 때 국가가 어떤 지경이 되는지를 그리스에서 새삼 실감할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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