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개발업자 도널드 트럼프란 이름이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88년 그의 자서전 ‘트럼프 - 아메리카의 꿈 ,재계의 새 우상’이 번역 출간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문학적 액수의 재산을 자랑하면서 아름다운 금발의 부인 이바나를 늘 대동하고 다니는 트럼프는 보통사람들이 꿈도 꾸기 어려운 성공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얼마 못가 자신보다 한참어린 배우 지망생 말라 메이플스와의 떠들썩한 스캔들과 이혼소송으로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그는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에서 고분분투하는 취업준비생들에게 ‘너 해고야(You’re fired)’를 외치는 ‘갑 중의 갑’ 역할로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지난 6월 16일 트럼프가 2016년 공화당 대선 경선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만 해도, 솔직히 "노욕이 또 발동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 돼야하는 이유가 성공해 부자가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멕시코인은 성폭행이나 하며 미국에 마약이나 몰래 들여오는 족속이라고 말하는 사람, 이슬람국가(IS)를 퇴치할 수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적이 알까봐 그 방법이 뭔지는 말하지 않겠다는 수준의 인물을 미국 국민이 진지한 대선 후보로 여길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트럼프가 대선출마 포기를 선언했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상대로 싸워봤자 너무 쉽게 이길게 뻔해서 재미없기 때문"이란 황당무계한 이유를 늘어놓는 모습을 뉴스로 지켜보면서, 과대망상증에 빠진 자기성애주의자의 표본을 본 듯한 느낌이었던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난 5년동안 과연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한국시간으로 오늘 오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폭스TV 주최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첫 토론회의 무대 중앙에 선 트럼프가 나머지 후보 9명을 자신의 양 옆에 도열시켜 놓은 모습을 지켜보면서 복잡한 느낌이 들었다. 트럼프를 오늘 이 자리로 이끈 것은 버락 오바마 정부 7년에 대한 공화당 지지자들의 피로감일 수도 있고, 평등과 소수인권보호 이데올로기에 치이고 치여서 설 자리를 잃은 골수 보수주의자들의 울분일 수있으며, ‘세계의 경찰’이었던 위대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국수주의자들의 분노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트럼프는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속 시원하게 대신 해주는 메신저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트럼프 돌풍은 글로벌 경제위기 발발 이후 세계 곳곳에서 폭발한 기성정치체제와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와 일맥상통한다. 프랑스,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극우정당들의 지지율이 치솟고, 독일에서 반이슬람과 반이민주의를 내세운 페기다 집회가 확산됐던 것과 트럼프 돌풍은 결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정치, 경제 노선은 다르지만 그리스 국민들이 급진좌파 시리자를 지지하는 것이나,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신생정당 오성운동과 포데모스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현상도 마찬가지이다.영국 노동당 당수 선거전에서 골수좌파 제레미 코빈에 많은 당원들이 열광하고 있는 현상 역시 트럼프 돌풍의 또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21세기 세계는 과연 ‘트럼프 신드럼’을 극복하고 중도와 타협의 미덕을 되찾을 수있을까.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갈등을 중재하는 본연의 기능을 회복할 수있을까. 지금의 이 위기가 한단계 더 성장하고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될지,아니면 무한 혼란으로 치닫는 중단 단계일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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