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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로 유명한 194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TS엘리엇(1888~1965)이 절친이자 자신의 '뮤즈'였던 에밀리 헤일에게 보낸 1131통의 열렬한 연애편지가 2일(현지시간) 반세기만에 공개됐다.
가디언 등은 이날 프린스턴대 도서관이 연구자 및 일반에 공개한 엘리엇의 편지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편지는 엘리엇이 1930년부터 1957년까지 보낸 편지로, 문학계에서는 엘리엇의 사생활과 작품에 새로운 시각과 정보를 제공해주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엘리엇은 평생 두번 결혼했으며, 첫번째 부인 비비엔 헤이우즈와는 1915~1947년 결혼생활을 했고, 헤이우드가 정신병원에서 사망한지 10년후인 1957년에 38세 연하의 출판사 직원 에스메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했다.플레처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엘리엇의 삶에서 에밀리 헤일이란 여성의 존재는 상세히 알려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오랫동안 헤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를 주고받아왔다는 점에서, 헤일이 엘리엇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엘리엇 전문가인 노스캐롤라이나대 토니 쿠바 교수는 "이 편지들은 엘리엇의 (시인으로서)커리어에 있어 잃어버린 조각이다. 20세기의 중요한 시인인 엘리엇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공개"라고 편지의 의미를 평가했다.
엘리엇과 헤일은 1912년에 만났다. 엘리엇은 하버드대에 재학 중이었고, 헤일은 스미스대 학생이었다. 이후 엘리엇이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친분관계는 계속됐다.
엘리엇이 1930년 10월 3일 헤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런던의 한 티파티에서 헤일을 만났을 당시 느꼈던 절절했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헤일에게 "내 사랑은 너무나 순수하다"며 "이 편지가 내 생애 마지막 러브레터"라고 썼다.
같은 해 11월 편지에는 헤일이 앞서 보낸 편지에 답장해준데 대해 "당신이 나를 완벽하게 행복하게 만들었다. 생애 어떤 때보다 더 행복하다. 내 생애 유일한 행복은 지금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다 .비록 깊은 상실 및 슬픔과 동일한 행복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초자연적 황홀경(supernatural ecstasy)"이라고 털어놓았다.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죽은 척 노력하고 있다. 내 심장이 죽은 것처럼 말이다"라고도 썼다.
이런 고백에도 헤일은 엘리엇의 사랑을 받아주기 보다는 우정관계를 유지했다. 이 기간동안 엘리엇은 당시 아내였던 헤이우즈의 정신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일도 물론 엘리엇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우정에 머물렀던 두 사람의 관계는 1932년 엘리엇의 부인 헤이우즈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1935부터 1939년까지 두 사람은 영국에서 여름휴가를 함께 보냈다. 헤일은 이 시기에 두 사람의 유대감이 매우 깊어졌다고 주변에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47년 헤이우즈가 사망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갑자기 멀어지게 된다. 엘리엇이 플레처와 재혼한 데 대해 헤일은 "충격과 슬픔"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전은 또 있다.
엘리엇이 헤일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처음으로 공개된 2일, 엘리엇이 1960년 프린스턴대에 보낸 편지도 함께 공개된 것이다. 엘리엇은 헤일이 자신이 보낸 편지들을 프린스턴대 도서관에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 편지를 써서 프린스턴대에 보냈다.
엘리엇은 이 편지에서 헤일이 기증한 편지는 두 사람의 사후 50년되는 해에 일반에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일은 1969년에 사망했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20년 1월 2일에야 편지가 공개된 것은 바로 이런 엘리엇의 요구때문이었다 .엘리엇은 헤일이 넘긴 편지들이 공개될 때, 자신이 1960년에 프린스턴대에 보낸 편지도 함께 공개하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일 추가로 공개된 엘리엇의 편지 내용은, 그가 젊은 시절 헤일에게 보냈던 열렬한 사랑고백과는 180도 다르다.
"망상에 사로잡힌 남자가 쓴 편지"로,"헤일과는 성관계를 갖지 않았"으며, "첫번째 아내가 사망했을 때 내가 헤일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았다"는 것이다. "헤일이 나쁜 취향을 가졌"고, 자신의 시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내 작품 보다 내 명성을 더 좋아하는 여자"란 표현도 썼다.
더 심한 표현도 있다.
"에밀리 헤일은 (나와 결혼했다면) 내 안에 있는 시인을 죽였을 것이다. 비비엔은 거의 나를 죽였지만, 그녀는 (내 안의) 시인을 계속 살아있게 했다( Emily Hale would have killed the poet in me; Vivienne nearly was the death of me, but she kept the poet alive)"는 것이다.
시인의 '연인'이나 '부인'은 못되어도, '뮤즈'로 남고 싶어했을 헤일의 영혼에, 엘리엇은 사후 55년만에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 대못을 박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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