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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매력'의 땅 발칸반도를 가다-보스니아 사라예보⓶

bluefox61 2024. 1. 12. 18:03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는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매력을 가진 도시입니다. 하지만 1992~1996년 내전의 비극을 여전히 간직한 슬픔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비극이 쉽게 잊혀지는 게 아니라는 점은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비극이 벌어진지 4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논쟁도 여전하지요. 

 

그런데 , 보스니아는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랐습니다. 아직도 건물들이 폭탄 맞아 무너진채 그대로 있고, 총탄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사라예보나 보스니아의 다른 도시들이 내전 직후와 똑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였으면, 특정 장소를 제외하고, 금방 건물들을 복구했을 것같은데 보스니아에는 내전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라예보의 그 악명높은 '스나이퍼 골목 (앨리)'에 있는 건물 외벽들에는 총탄 자국이 생생히 남아있었습니다.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인근 높은 건물이나 고지대에 자리잡고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고 합니다.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스나이퍼 골목 말고도 도시 곳곳에서 쉽게 총탄 자국을 만날 수있습니다. 내전이 벌어지자, 사이좋았던 이웃들이 한 순간에 살인마 , 악마가 됐다고 하지요. 

사라예보 건물 외벽의 총탄 자국들

 

1992년   4월 6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 1425일간 사라예보에서는 포위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기록은 2차 대전 때 대표적인 포위전이었던 러시아 레닌그라드 포위전 기간의 2배에 달하며, 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된 포위전으로 꼽힙니다. 

 

비극의 시작은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이었습니다. 그 뿌리는 기나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국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강행하자 세르비아계 정당과 단체들은 "우리도 분리독립해 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울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세르비아계 민병대(스릅스카군)이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봉쇄하고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스릅스카 최고 지도자는 라도반 카라지치, 민병대를 지휘한 최고사령관은 라트코 믈라디치였습니다.  스릅스카군은 민병대란 이름이 무색하게 막강한 병력과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사라예보에는 보스니아 정부군이 있었지만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 세르비아 민병대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2019년 3월 21일>

1990년대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대량학살을 자행한 혐의를 받아온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73)가 20일(현지시간) 유엔 특별법정인 유고전범재판소(ICTY) 항소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BBC 등의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ICTY 재판부는 이날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1심 40년형을 깨고 종신형을 선고했다.재판장은 "대량학살에서 피고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40년 형은 가볍다"며 최고형에 해당하는 종신형이 타당하다고 밝혔다.이날 재판을 지켜본 학살피해자 유족들은 "이런 날을 애타게 기다려왔다"며 눈물을 흘리며 판결을 지지했다.BBC에 따르면, 카라지치는 종신형 판결이 내려지는 동안 무표정한 태도를 나타냈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최고 지도자였던 카라지치는 내전이 끝난 후 13년 동안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대체의학자 '드라간 다비치 박사'로 변장한 채 살다가 2008년 7월 붙잡혔다. 그는 보스니아 내전(1992~95년) 당시인 1995년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진 무슬림 주민 8000명 학살을 주도하는 등 11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2016년 ICTY는 카라지치에게 40년형을 선고했지만, 검찰 측과 피고 측 모두 이에 불복해 항소한 바 있다.

ICTY는 2017년 11월  '발칸의 도살자'로 악명높았던 라트코 믈라디치(76)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민병대 사령관에 대해서도 종신형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11개 기소 항목 중 제노사이드(학살) 1항목, 반인륜 범죄 4항목 및 일반 교전규칙 위반 5항목 등 10건에서 믈라디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종신형을 선고했다. 기소 항목 중 제노사이드 1항목만 인정되지 않았다. 믈라디치는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치는 등 난동을 부려 강제 퇴장 명령을 받기도 했다.

믈라디치는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카라지치가 체포된지 3년 뒤인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로부터 불과 100㎞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체포된 바 있다. 카라지치에 이어 믈라디치까지 세르비아에 은둔하고 있다가 체포되면서, 세르비아가 전범들을 장기간 비호해온 게 아니냐는 의혹이 또다시 힘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파키스탄 군부의 오사마 빈 라덴 비호설과 비교하면서, 세르비아를 ‘발칸판 파키스탄’으로까지 거론하기도 했다. 카라지치는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가명을 사용해 대체의학치료사로 버젓이 활동하다 도피 13년 만에 체포됐고, 믈라디치는 베오그라드로부터 불과 100㎞도 채 떨어지지 않은 라자레보 마을에 있는 사촌집에서 밀로라드코마디치란 가명으로 거주해오다 체포됐다.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3인 대통령위원회의 크로아티아계 위원은 “믈라디치 검거로 세르비아 당국이 믈라디치 소재를 항상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의 안보분석가인 알렉산데르 라디치 역시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2008년까지는 믈라디치가 세르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지적했다.카라지치가 체포됐던 2008년, 세르비아에서는 민족주의 성향의 정부가 총선에서 패배하고 보리스 타디치 현 대통령이 이끄는 친유럽연합(EU)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ICTY 수석검사인 벨기에인 세르주 브라메르츠는 5월 중순 발표한 보고서에서 “세르비아 정부가 전범체포에 여전히 매우 비협조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현장을 둘러보니, 과연 사라예보 주변은 산들이 빙 둘러싸고 있더군요. 높은 지대를 점령한 민병대는 아래쪽 시내를 향해 무차별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3 년 10개월간의 무차별 저격과 포격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은 1만2000여명에 달하고, 이중1600여명은 어린이라고 합니다. 부상자 수도 5만명이 넘습니다. 포위전이 계속되는 동안 주민들은 땅굴을 파서 물자를 들여오는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1992년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됐지만 사라예보 포위전과 내전은 계속됐습니다. 1995년 12월 14일 맺어진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스릅스카 공화국 양측 존재의 공인, 내전을 둘러싼 세 민족정당의 갈등 봉합과 화해가 선언됐습니다. 그래도 사라예보 포위전은 평화협정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가 , 1996년 2월말에야 겨우 끝났습니다. 

 

 

사라예보 올드타운 뒤쪽의 완만한 언덕 길을 걸어 올라가 봅니다.  노란 요새로 향하는 길이지요. 

 

 

언덕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바로 공동묘지입니다. 흰색 묘석들이 석양을 받으며 서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묘석을 들여다보면, 이렇게나 많은 고인들이 사망한 연도가 모두 비슷합니다. 

 

 

이 청년은 1994년에 불과 23세 나이로 사망했군요. 어떻게 21세기 첨단기술 시대를 코 앞에 둔 20세기 말에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있었을까요? 하긴 지금도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네요. 저는 한동안 이 공동묘지에서 망연자실한채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공동묘지의 맨 앞쪽에 범상치않은 묘석 하나가 있습니다. 고인의 이름은 라심 델리치. 1949년에 태어나 2010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1세입니다. 이 묘지에 묻힌 사람들이 대부분 내전기간에 사망한 사람들인데 반해, 델리치는 내전이 끝난 후에 사망했는데도 이 묘지에 안장된 모양입니다. 이 사람의 사연이  궁금해 구글에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델리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군인으로 내전 당시 육군 사령관이었습니다. 공화국 국민들에게나, 사라예보 시민들에게는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맞서 싸웠던 영웅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가 사망한 후 사라예보 공동묘지에 안장한 듯합니다.  바로 이 분입니다. 

 

라심 델리치 보스니아 육군 사령관

 

델리치의 최대 업적은 악전고투 끝에 정부군의 붕괴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낸 것 자체가 엄청난 업적이었다는 것이죠. 그 덕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가 미국 중재로 열린 협상테이블에서 세르비아를 상대로 협상을 벌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분의 사연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열린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 범죄자로 피고석에 서게 된 겁니다. 이 재판에서는 가해자인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들도 피고석에 섰지만, 피해국인 보스니아 쪽에서도 델리치처럼 전범 재판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혐의는 내전 당시 자신의 관할 하에 있었던 부대의  반인도적 범죄를 방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중동, 북아프리카에서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돕기 위해 자원병들이 들어왔습니다. 보스니아 육군은 1993년 8월 외국인 자원병들을 모아 일명 '엘 무자히드(El Mujahid) '를 구성했습니다. 이 부대의 대원들은 세르비아계 민병대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와도 맞서 싸웠는데,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고문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검찰 측은 델리치가 이같은 사실을 알았음에도 막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델리치는 국제형사재판소 재판에서 3년형을 받았고, 항소해 재판결과를 기다리다가 사라예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영국 가디언은 다음과 같은 부고 기사를 냈습니다. 


ObituaryGeneral Rasim Delic obituary
Bosnian government army chief during the 1990s Bosnian war

Gabriel Partos Wed 19 May 2010 17.59 BST

General Rasim Delic, who has died of a heart condition, aged 61, was the highest-ranking Bosnian Muslim (Bosniak) official – civilian or military – to have been convicted of war crimes by the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 in the Hague. However, his relatively lenient sentence of three years' imprisonment in 2008 reflected the fact that he had not been found guilty of personal complicity in atrocities.

Instead, Delic, who commanded the Bosnian government army for much of the war that devastated his country from 1992 to 1995, was convicted on the basis of command responsibility – on the grounds that he had failed to punish foreign Muslim fighters, who were notionally under his control, for the mistreatment of captured Bosnian Serbs.For many Bosniaks, Delic was a hero who had been instrumental in organising the mainly Muslim Bosnian army into a relatively effective fighting force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as the Bosnian Serb army, enjoying a huge superiority in weapons, embarked on a campaign to carve out a separate state within Bosnia.

Under Delic's command, Sarajevo survived its lengthy siege by Bosnian Serb forces, the government army fought a separate war against the Bosnian Croats, and in the final months of the war it recaptured, in alliance with the Croatian army, large areas from the Bosnian Serbs.Yet, to his detractors, Delic's reputation was tainted by several ill-conceived and costly attempts to break the siege of Sarajevo and by the abandonment of the government-held enclave of Srebrenica to Bosnian Serb forces in July 1995, which opened the way for the worst single atrocity in Europe since the second world war – the massacre of around 8,000 Bosniak men and boys.

Delic was also responsible for subordinating the army to Bosnia's political leadership, turning it into an instrument of President Alija Izetbegovic's increasingly nationalist Party of Democratic Action, the main force representing Bosniaks.

Born in C in north-eastern Bosnia, Delic joined the Yugoslav army at the age of 18 and embarked on a military career, serving as the commander of an artillery regiment in Sarajevo during the 1980s. It was not until after Bosnia'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rom Yugoslavia was recognised by the main western countries in early April 1992, prompting the Bosnian Serb forces to launch their onslaught against the new state, that Delic defected from the Yugoslav army to join the nascent Bosnian government army. The new, initially ramshackle force was badly in need of professional officers such as Delic. He was sent to Visoko, north of Sarajevo, to organise and train the army in central Bosnia. His group was given a special status, bypassing the army's main staff and directly answerable to Izetbegovic.Barely a year later, he was promoted to the newly created post of commandant of the main staff, leapfrogging several more senior officers, including the chief of staff, General Sefer Halilovic, whose personal ambitions and disagreements with Izetbegovic were to lead to his sacking at the end of 1993.Delic took over at an inauspicious time. The Bosnian Serb army's grip on some 70% of the country appeared unassailable. The prospect of international military intervention to help the Bosnian government was fading. And the Bosnian Croat forces had just turned against the government side as they attempted to detach the Croat-inhabited Herzegovina region from the rest of the state.

Delic's greatest achievement was to prevent the collapse of the government army in the second half of 1993. That provided breathing space for negotiations, orchestrated by the US administration, which ended the conflict with the Bosnian Croats in March 1994. However, it took another 18 months before the alliance with the Bosnian Croats and Croatia itself led to the recapture of large swaths of territory from the Bosnian Serbs in the north-west of the country. The change in the balance of forces, reinforced by Nato air strikes, led to the Dayton peace agreement of November 1995, which divided Bosnia into two largely autonomous entities, the Bosniak-Bosnian Croat federation and the Bosnian Serb republic, Republika Srpska. Delic became the commander of the federation army until his retirement in 2000.

He was charged with four counts of war crimes by the tribunal in 2005. Unlike his opposite number in the Bosnian Serb army, General Ratko Mladic, who has been evading justice since his indictment in 1995, Delic immediately surrendered himself to the tribunal. He pleaded not guilty to the charges that he had failed to punish foreign Islamic fighters of the El Mujahid detachment, who had killed and mistreated captured Bosnian Serbs in 1995. Delic argued that he had no effective control over the foreign fighters. However, the judges ruled that Delic should have made greater efforts to impose control and to have punished them for atrocities.Delic, who was awaiting the outcome of an appeal at the time of his death, is survived by his wife, Suada, and two sons. Rasim Delic, army officer, born 4 February 1949; died 16 April 2010

 

 
 

사라예보 어린이 전쟁 박물관에서 만난 한 사연.

사라예보의 한적한 뒷길을 걷다가 들어간 '어린이 전쟁 박물관'에서 전시품들을 살펴보다가 눈물을 펑펑 흘리고 말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사라예보의 어린이들이 내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물품과 사연들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위 사진을 보면, 젊은 여성이 예쁜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을 박물관에 기증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한 사람은 사진 속의 아기입니다.  사진 속의 여성은 내전 기간동안 세르비아계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후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고, 아기를 낳아 혼자 키웠다고 합니다. 아기는 훗날 자라서 , 자신이 세르비아계 남성의 성폭행으로 잉태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 엄마의 아이야." 
 
2006년에 제작됐던 영화 <그르바비차>에서 주인공 소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네 아버지는 내전 때 나가서 싸우다 전사했어" 라고 말해왔지만, 결국 소녀는 진실을 알게 되지요. <그르바비차>는 역시 허구가 아니라 실화였습니다. 
 
영화 <그르바비차>

보스니아 내전은 세르비아계 군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 인종을 달리하는 주민들간의 증오범죄로 20세기말 인류역사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다.이슬람계 주민 8000여명을 한자리에서 학살한 스레브레니차 사건을 비롯해 ,이슬람 여성들을 잡아다가 강간해 아기를 낳게해 혈통을 ‘정화’하려했던 시도는 나치의 만행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보스니아 주민들에게 내전은 아직도 떠올리기조차 힘든 악몽이다. 사라예보의 외곽에 있는 스레브레니차에서는 지금도 살해당했던 주민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있으며, 세르비아계 군인들로부터 강간당한 보스니아 여성들이 낳은 아기들은 사춘기인 십대 중반의 나이를 넘기고 있는 중이다.

지난 200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그르바비차>가 공개됐을 당시, 전세계는 보스니아내전의 참혹상에 새삼 할말을 잃고 말았었다.영화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르바비차는 사라예보와 접해있는 도시로, 세르비아(계) 군은 96년 3월까지이곳을 점령한채 이른바 고문, 강간캠프를 세워 수만명을 살해하고 강간했다.세르비아군의 강간은 단순히 욕망을 채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보스니아 여성에게 세르비아 아이를 낳게 만들려는 인종청소 차원의 치밀한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처럼 비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증오 등의 감정분출을 자제하고 매우 차분한 시선으로 전개된다.’짐승의 딸‘을 사랑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어머니란 존재가 있기에, 세상엔 아직 희망이 남아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이 영화를 만든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베를린영화제 폐막식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 트로피를 손에 들고 이렇게 수상소감을 말했었다.“보스니아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전범인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는 여전히 유럽 모처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전쟁당시 보스니아 여성 2만명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으며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유럽이며, 아무도 그들을 잡는데 관심이 없다. 내 영화가 보스니아에 대한 당신들의 시각을 바꿔놓길 희망한다.”

출처:https://bluemovie.tistory.com/101 [푸른여우가 본 세상:티스토리]
 
 
위 전시품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최대 인종청소가 벌어진 스레브레니차에 살고 있던 소년이 구호품을 비행기에 싣고 온 보스니아 공군 조종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조종사는 소년에게 "내게도 너만한 나이의 아들이 있다"면서 비행기 모형을 선물해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내전이 끝나고 한참 시간이 흘러 소년은 우연히 어떤 자리에 갔다가 조종사의 아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소년은 반가워서 , 조종사의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조종사의 아들의 대답은 "전사하셨다"였다고 합니다. 
 
사라예보에서 만난 몇몇 현지인들에게 내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린이전쟁박물관에서 일하는 한 젊은 여성은 "세대차가 있는 듯하다"고 하더군요. 내전을 직접 겪은 중장년층은 당시를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가슴 속에 상처로 담아두고 있지만, 종전 이후에 태어난 20대 청년들은 "아픈 과거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고 해요. 물론 개인마다 좀 차이는 있습니다.  내전 발발 후 스위스로 가서 오랫동안 살다가 돌아왔다는 나이 지긋한 카페 여주인은  내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듯 하더군요. 보스니아와 사라예보가 자꾸 내전의 어두운 역사로 언급되는게 좀 불편한 것같았어요. 
 

 

케이블 카를 타고 산 위에서 내려다 본 사라예보의 모습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지요.   산 위쪽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아래쪽으로 폭격과 사격을 가했다고 하는데, 사라예보가 포위하기 용이한 지형이란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