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신화><불에서 불로> 등의 저작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이자 진보적 사회비평가인 나오미 울프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딸인 친구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대화하다가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적인 외교정책, 대테러전을 명분삼아 제정한 ‘애국법’, 인권탄압적인 정책들, 언론 및 사회단체 감시, 급격하게 보수화 및 획일화되어가는 미국 사회의 모습에 대해 자신이 비판을 쏟아낼때마다 친구는 한결같이 “나치 독일에서도 그랬어”라고 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친구는 의아해하는 울프의 손을 서가로 이끌고 가서 , 나치 독일의 역사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울프는 책을 펼쳐 읽어내려가는 순간,60~70여년전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만행 하나하나 바로 지금 이시대, 부시 정부 시대의 그것과 놀랄만큼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울프는 그 순간을“ 한구절 한구절마다 지금의 미국 사회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8년에 걸쳐 미국을 사실상 파시즘 국가로 변모시켜 버렸다는 사실에 울프는 새삼 경악하게 된다.
▲ 미국의 종말,
<미국의 종말>은 민주주의,표현의 자유,권력에 대한 감시 등을 절대 진리로 지키고자했던 미국 건국 아버지들의 정신을 지난 8년동안 부시가 어떻게 훼손해왔으며, 애국이란 이름을 내세워 미국사회에 어떻게 파시즘을 뿌리내려왔는가에 대한 울프의 고발서이다. 건국정신의 훼손은 곧 미국의 종말이라는 것이 울프의 주장이다.
보통 미국인들로 하여금 사안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깨닫게 만들려는데 집필의 의도가 있는 만큼, 책은 한번 손에 잡으면 단번에 읽어내려갈 수있을만큼 이해하기 쉽고 명쾌하다. 책에서 거론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 역시 언론을 통해 공개됐던 것들이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와 관타나모기지의 테러용의자 수용소 인권탄압 논란부터 무고한 시민을 테러분자로 몰아 구속한 사건, 부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른 딕시칙스 사건,민간군사기업 블랙워터가 이라크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됐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저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감춰져왔던 새로운 사실을 폭로하기보다는 이미 미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숙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들, 평소 무심하게 보아 넘겨왔던 것들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가를 깨닫게 하는데 울프는 이 책의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울프는 책에서 ‘파시즘으로의 이행’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책을 쓰던 2007년 현재 , 미국인의 일상은 아주 말끔하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자유를 지키는 기본 제도들은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으로 이행은 반드시 군화발과 함께 이뤄지지는 않는다. 울프의 말에 따르면, “미국판 파시즘은 기존 기구와 제도, 조직은 그대로 두는 척하면서 그 기능은 약화시키는”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울프가 파시즘체제하의 독일 및 이탈리아와 부시 체제 하의 미국이 비슷하다고 보는 이유는 총 10가지이다. 첫째는 공포감의 조성이다. 나치가 ‘유대민족’을 악으로 규정해 독일인의 공포감을 자극했듯이 , 부시도 ‘악의 축’‘이슬람 테러리즘’ 등 무시무시한 외부 적의 존재를 강조했다. 그 결과 소위 ‘애국법’과 ‘조국안보부(국토안보부) ’를 만들어냈는데,이는 나치체제하에서 법적으로 시민자유권을 구속하고 ‘조국(Heimat)’이란 단어가 유난히 강조됐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둘째는 관타나모 수용소처럼 법의 사각지대인 비밀수용소 건설. 세번째는 블랙워터와 같은 민간 군사조직의 활약이다. 저자는 블랙워터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초토화됐던 뉴올리언스에서 치안유지를 이유로 미국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던 것을 주목하고 있다. 네번째는 정부 권력의 시민감시, 다섯번째 시민단체에 침투해 벌이는 첩보활동, 여섯번째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불법적인 구금 , 일곱번째 딕시칙스 사건에서 보듯 특정인물 매국노로 만들기, 여덟번째 언론탄압, 아홉번째 정당하게 비판하는 자를 간첩 또는 반역자로 몰아부치기, 열번째 법치주의의 훼손이다. 울프는 이 열가지가 나치체제와 부시체제에서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영화 <미국의 종말>
아카데미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일반인들과 적극 소통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영화의 형태로도 구체화됐다. 그는 2008년 하반기에 책의 제목과 똑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 <미국의 종말>을 발표했다. 감독은 애니 선드버그와 리키 스턴. 이 작품은 지난 10월 미국 햄턴스 국제영화제, 영국 셰필드 다큐페스티벌 등에서 선보였으며, 온라인영화관인 스내그필름스닷컴(www.snagfilms.com) 등에서 상영돼 별 다섯개 평점을 받기도 했다.
영화는 관광객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는 화면으로 시작한다. 세계인들에게 미국의 이미지는 곧 자유의 여신상이다.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울프의 강의모습과 자료화면을 중심으로 구성된 영화는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울프가 책에서 지적한 블랙워터 요원들의 뉴올리언스 활동이 의심스럽다면 영화 속의 자료화면을 통해 확인해볼 수있다. 아무 죄없는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느닷없이 테러분자로 지목돼 온갖 고초를 겪을 수있었을까 이해하기 어렵다면, 영화 속에서 그 당사자가 직접 들려주는 당시의 상황을 통해 확인할 수있는 것이다.
책에 없는 사례도 있는데, 고문허용 정책을 둘러싸고 의회에서 의원들과 소위 전문가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에서 고문지지자로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존 유라는 이름의 한국계 미국 법학자이다. UC버클리대 법대 교수인 그는 부시행정부의 고문합법화에 대한 법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악명높다. 그런가하면 월남전 공훈으로 무공훈장을 받았던 반전운동가가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늙은 어머니까지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더라며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은 문자의 힘을 뛰어넘는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파시즘은 매우 복잡한 개념이다. 부시체제를 곧 파시즘 체제로 보는 저자의 시각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미국 국민들은 지난해 11월 대통령선거를 통해 부시 8년이 미국에 무엇을 남겼는가를 자각하고 ,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를 선택함으로써 변화를 이뤄냈다. “침묵하고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있는 미국은 , 민주주의 조상들이 세운 미국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반증한다. 진정한 미국의 종말인 것이다”라는 저자의 경고를 근거로 한다면 미국은 ‘종말’과 ‘파시즘으로의 이행’ 위기를 극복한 셈이다.
문제는 이 책이 지금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다. 저자 자신도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세계도처에서 비슷한 징후가 보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1934년 나치가 ‘국가전복과 관련한 법률’을 제정해 무려 10만명을 정치적 비방과 중상으로 처벌했던 것은 지금 한국의 사이버모욕죄 제정 움직임을 연상케 만든다. 부시를 비판한 딕시칙스에 대해 보수 미국인들과 언론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던 사건의 의미는 미네르바에게 원화가치하락의 책임을 지우는 지금 한국의 상황과 같은 의미로 읽혀진다. 나오미 울프의 <미국의 종말>이 오싹하게 두려운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 책을 읽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수의 시대 (0) | 2012.01.04 |
---|---|
읽을책 (0) | 2012.01.03 |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0) | 2012.01.03 |
읽은 책 (2) | 2012.01.02 |
왜 제인 오스틴인가 (0) | 2006.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