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장만옥

bluefox61 2008. 2. 18. 15:44
여자가 여자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릴 수도 있더군요.
몇해전 화양연화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시네코아 극장에서 열린
일반시사회장에서 제 가슴은 순전히 한 여자때문에 쿵쾅거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망사 스타킹에 조금 투박해보이는 구두를 신은 튀는 옷차림을 하고
극장 벽에 무심히 기댄 한 여자때문에...
그녀는 바로 장만옥이었죠.
그녀와 내가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숨쉬고 있다니!
아비정전에서 그녀가 연기했던 수리첸처럼 전 그 짧은 1분이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있을 수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있었답니다.

장만옥이란 이름이 맨 처음 다가온 것은 순전히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 때문이었죠.
비가 쏟아지는 밤 부둣가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손을 맞잡고
전화 부스로 뛰어들어가 열렬한 키스를 나누던 그 장면!
그리고 그녀는 아비정전에서 옛 연인과 나눴던 1분의 추억을 떨궈내지 못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체육관 상점점원으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후 장만옥은 관금붕의 완령옥과 인재뉴약,
그리고 동사서독 이르마 베프 첨밀밀 차이니스 박스 소살리토를 거쳐 
화양연화와 영웅으로 가슴을 파고 들었지요.
달빛이 비추는 어두운 복도의 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던 20년대 중국 스타 배우 완령옥, 
그리고 치파오의 높다란 깃 사이로 하얀 목덜미를 드러내던 화양연화의 첸 부인처럼
장만옥은 나직하게 흐르는 재즈 선율과도 같은 치명적인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장만옥 혹은 매기 청.
미스 홍콩 출신이니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미모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죠. 어떤땐 아름다워보이다가도,
어떤땐 가는 눈매의 지극히 평범한 동양여자의 얼굴같기도 하구요.
지극히 여성스럽다고 느껴지다가, 어떤 순간엔 중성적인 것같기도 합니다.
쥐면 부서질 듯 연약해보이다가도, 그녀는 어느새 억척 또순이로 변해있죠.

그녀는 임청하의 뇌쇄적 미모도, 매염방의 관능미도, 양자경의 발차기도 없었지만,
자기 복제가 극심했던 80,90년대 홍콩영화계를 통과해 배우로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홍콩 여배우 중 한명입니다.
데뷔 초기에 수많은 상업영화들에서 무가치하게 소비됐던 그녀는
왕가위, 관금붕, 진가신 등 홍콩의 대표적인 명감독들을 거치며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다듬어졌습니다.

그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그녀가 가장 아름다워보일 때는
이상스럽게도 운명의 덫에 걸려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겐 일종의 수동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같아요.실제 장만옥은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훨씬 더 서구적이고 발랄한 이미지이지만요.
열혈남아와 아비정전, 그리고 동사서독에서 그녀는 떠나간 연인을 잊지 못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 
완령옥과 화양연화에서는 유부남과의 희망없는 사랑에 괴로워하지요.
첨밀밀에서 그녀는 계산 속 밝고 악착스런 또순이인체 하지만, 씩씩하게 사랑을 찾아나가기 보다는 
초라하게 변해버린 조폭 애인에 대한 연민을 택하는 정많은 여자죠.
그러면서도 첫사랑을 잊지못하는 괴로움이 내비칠 때 그녀는 왠지 처연한 아름다움을 뿜어냅니다.

그리고 우린 그런 그녀와 거부할 수없는 사랑에 다시한번 빠져들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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