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오시마 나기사를 추억하다

bluefox61 2013. 1. 16. 21:19

누구에게나 '내 인생의 영화' 리스트가 있을 겁니다.

내 경우, 어린시절의 영화에는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과 줄리 앤드류스의 '사운드 오브 뮤직',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스페인의 꼬마뮤지컬요정 마리솔의 음악영화들이 있었지요.

 

 

성인이 되면서 정말 많은 영화들을 섭렵했지만, 일본영화에 빠져 지낸 한시절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오시마 나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다른영화'를 보는 거의 유일한 창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경복궁앞 프랑스 문화원의 시네마테크였지요.

그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들 중 유난히 매회 상영때마다 전석매진(기껏해야 100석도 안되지만)은 물론이고, 계단에 앉아서라도 기어이 보겠다는 사람들이 몰리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시마 나기사의 그 유명한 '감각의 제국'이었지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감각의 제국'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그 순간의 웬지 후끈했던 프랑스문화원 시네마테크 안의 열기와 지하공간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기억납니다. 

그땐 일본 영화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는데, 오시마 영화를 봤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열정의 제국'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우물 장면>

 


<열정의 제국> 프랑스 포스터


사실 오시마 영화들 중 제일 처음 본 것이 '열정의 제국'이었는데 다른 건 다 잊어도, 꿈에서 우물에 빠진 여자주인공이 자기가 정부와 함께 죽인 늙은 남편의 환영을 보는 장면,그리고 우물 밖에 서서 밑에 있는 아내를 내려다 보던 남편이 떨어뜨린 지푸라기가 여자의 눈에 박히는 장면이 저를 얼마나 전율하게 만들었던지요. '열정의 제국'이 그 정도였으니, 그 다음에 본 '감각의 제국'에서 느꼈던 쇼크는 당연히 메가톤 급이었지요.  심지어 저는 오시마의 이해하기 힘든 인간과 동물(그것도 고릴라)간의 사랑(그것도 정신적 육체적)을 다룬 파격적인 작품 '막스 내사랑'까지 프랑스문화원에서 본 사람입니다.^^


2000년대 초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시마 나기사의 최신작 ``고하토``를 너무나 보고 싶었는데, 표가 동나는 바람에 꿩대신 닭이라고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상영된 이른바 ``고하토 메이킹 ``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고하토``에 출연한 기타노 다케시와 최양일이 세트장에서 휠체어에 탄 오시마 나기사에게 야단맞는 장면이었습니다. 

기타노 다케시가 누굽니까.칸과 베니스, 베를린영화제의 러브콜을 숱하게 받아온 당대 최고의 일본 감독 아닌가요. 그렇다면 최양일은 또 누구입니다. 오시마의 ``감각의 제국`` 조연출을 비롯해서 ``개달리다``등 뚝심있는 자기작품을 연달아 내놓고 있는 일본의 문제적 감독 아닙니까. (정확한 제목은 까먹었지만, 최양일이 80년대 오시마 영화에 배우로도 자주 출연한 적이 있다네요)

 

두 사람이 왜 오시마에게 그렇게 야단을 맞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근데,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다가 휠체어까지 타고 다시 촬영장에 복귀한 이 노장감독이 다 늙은 감독 배우를 야단치던 모습이 추상처럼 꼿꼿했던 것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더 인상적인 것은 그 다음 장면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여자)이 기죽은(척하는) 다케시에게 묻습니다. ````기분나쁘시겠네요.″그러나 다케시가 특유의 히죽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야단 맞는데 눈물이 다 나올뻔했어요. 감독님이 저렇게 야단칠만큼 기운을 차리신게 너무 기뻐서...″다케시가 이 영화를 찍다가 중간에 칸영화제 다녀오는 장면도 나옵니다. 경쟁부문에 출품된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칸으로 떠나기 전 ,오시마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엄한 선생 앞에선 중학생 같더군요. 

오시마 나기사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우상파타주의자``라고 할 수있을 겁니다. 쇼치쿠 영화사시절 선배세대들의 영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60년대 이른바 ``쇼치쿠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당시부터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일본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과 조소,그리고 금기에 대한 도전정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된 '감각의 제국'은 뻔뻔스럽고 도발적인 포르노그라피라고 할 수있습니다. 프랑스 자본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때는 전세계에서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풀버전으로 상영되는 나라가 없어서 일본인이 프랑스까지 관광가서 봐야할만큼 파격 그 자체이지요.  동반자살로 끝나는 기생과 유부남의 불륜은 전통극 가부키에서 정형화된 이야기인 것이 사실입니다. 데이비드 톰슨 같은 저명한 평론가는 오시마의 다음 작품인 <열정의 제국>(1978)과 묶어 ‘국제사회에서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의도한 얄팍한 기획’으로 평가하기도 했지요. 오시마가 이전에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통해 보여줬던 이상주의적 열정이 좌절되자, 그 빈자리를 선정성으로 채우려한다는 지적조차 적지 않았었지요. 


그러나 '감각의 제국'을 기꺼이 오시마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은  ‘사회적 컨텍스트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려는 관계의 운명적 파멸’(다나 폴란)을 다룬 '정치 영화'로 해석하고 있고, 저 역시 그 해석에 공감합니다. 오시마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두 남녀의 섹스는 사회적 속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필연적인 충동”이지요. 특히 영화 속에서 남녀주인공이 여관 마루에서 섹스를 하는 동안 바로 옆 담벼락 밖으로 군인들이 지나가는 장면은 오시마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려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오시마의 필모그래피>

 

고하토 (Gohatto, 1999)
막스 내 사랑 (Max My Love, 1987)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3)
열정의 제국 (In the Realm of Passion, 1978)
감각의 제국 (In the Realm of the Senses, 1976)
그 여름날의 누이 (Dear Summer Sister, 1972)
의식 (The Ceremony, 1971)
도쿄전쟁전후비화 (A Secret Post-Tokyo War Story, 1970)
소년 (Boy, 1969)
신주쿠의 도둑일기 (Diary of a Shinjuku Thief, 1969)
교사형 (Death By Hanging, 1968)
닌자 무예장 (Band of Ninja, 1967)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 (Night of the Killer, 1967)
일본춘가고 (Sing a Song of Sex, 1967)
백주의 살인마 (Violence at High Noon, 1966)
윤복이의 일기 (Yunbogi's Diary, 1965)
열락 (The Pleasures of the Flesh, 1965)
사육 (The Catch, 1961)
청춘 잔혹 이야기 (A Story of the Cruelties of Youth, 1960)
일본의 밤과 안개 (Night And Fog In Japan, 1960)
태양의 묘지 (The Sun's Burial, 1960)
사랑과 희망의 거리 (Street of Love and Hope, 1959)

 

<고하토>의 벗꽃나무 장면


오시마의 마지막 영화가 된 '고하토'는 19세기 사무라이집단 신센구미 내의 동성애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오시마 영화답게 죽음과 욕망이 현란하게 엇갈리는 작품이지요. 이런 주제는 [청춘잔혹사][사육] 등 60년대 대표작부터 70년대작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에 이르기까지 오시마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오시마는 한 은밀한 수컷 집단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욕망(섹스)과 죽음으로의 충동이 어떻게 한 시대, 한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는지를 매우 예리하게 그려냅니다. 그런점에서 [고하토]는, 제국주의광풍이 몰아치던 20세기 초반 일본의 기방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질펀한 섹스와 질투의 향연을 통해 허무주의적 시대관을 표현해냈던 [감각의 제국]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영화라고 할 수있을 것같습니다. 

지난 2000년 이 작품이 칸 영화제 경쟁부문을 통해 소개됐을 당시,평단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오시마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오시마 특유의 끝까지 밀어부치는(섹스이건 폭력이건) 힘이 [고하토]에서는 상대적으로 다소 순화돼거나 또는 지나치게 신중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하토]는 평생을 우상타파주의자로 살아온 노장감독의 변치않는 ``결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영화적 표현의 대담성을 추구(예를 들어 동성애따위)하기 보다는 폐쇄적인 집단에 들어온 미소년 한명을 둘러싼 사무라이들의 
애정행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치열한 갈등, 그리고 시대의 붕괴를 예감하는 한 사무라이의 무기력과 허무감 등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고하토]는 탁월한 심리극이라고 할 수있겠습니다.


오시마의 무엇이 시바 료타료의 역사소설 [신센구미 혈풍록]에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을까요. 신센구미는 메이지유신이 도입되기 직전인 19세기 중반, 기존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봉건제 권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우파 보수 무장집단이었는데, 기존 사무라이가 대를 이어 세습되는 것이었던 데 비해 급조된 신센구미는 무술에 재능이 있는 중인, 하층계급 출신도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영화에서 총장인 곤도(최양일)나 부장 히지가타 토시조 (기타노 다케시) 등이 정통 사무라이 출신이라면,미소년 가노 소자부로(마츠다 류헤이)는 부유한 옷감상인집안 출신, 그리고 다시로 효조(아사노 타다노부)는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으로 설정돼있습니다.이처럼 신센구미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집단이었던 것만큼,영화에서처럼 까다롭고 강력한 내부 규율(즉 고하토 御法度)가 필요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신센구미를 소재로 한 소설과 만화, 영화가 수없이 만들어져왔는데, 그것은 붕괴직전에 놓인 구질서의 마지막 찬란했던 순간,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그리고 마초이즘에 대한 매혹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있겠습니다. 

소설과 영화는 신센구미가 결정적으로 힘을 갖게된지 1년뒤 (구체적으로는 개혁파의 교토 방화와 천황납치시도를 신센구미가 막아냈던 이케다야 사건)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신센구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듯했던 시기이지요. 그러나 불과 4~5년뒤 메이지 천황의 유신으로 인해 
신센구미는 처참하게 해체되고 몰락해버립니다. ( 에드워드 즈윅의 [마지막 사무라이]와 겹쳐지는 시기)

[고하토]는 권력의 정점에서, 시대의 붕괴(즉 죽음)를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그 단초는 어이없게도 한 미소년을 둘러싼 사무라이들의 동성애와 질투로 인해 벌어진 살인사건이지요.영화에서 닥쳐올 몰락을 예감하는 유일한 사람은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하는 히치가타 토시조 부장 한사람 뿐입니다. 그는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가노가 대련에서 다시로에 어이없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 두사람간의 심상치않은 심리상태( 연인관계)를 단박에 눈치채지요. 그리고 의문의 살인사건은 다시로가 가노에게 접근한 또다른 사무라이에게 질투심을 느낀 나머지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됩니다.그리고 이 추문을 잠재우는 길은 가노로 하여금 다시로를 죽이게끔 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그러나 막상 가노가 다시로를 죽인 이후 히치가타는 또다시 의문에 휩싸입니다. 문제의 사무라이를 죽인 것은 과연 다시로인가, 아니면 가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제3의 인물(예를 들어 성실한 사범 오키다 소지) 인가. 오키다도 가노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혐오하는가. 
평생을 흔들림없이 살아왔을 히치가타는 이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에 내동댕이쳐버려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지켜온 세계와 시대의 붕괴를 예감하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벗꽃나무를 단칼로 베어버리는 것은 ,가장 아름다울때 산산히 흩어져버리는 벗꽃처럼 
시대의 처연한 죽음, 또는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시마는 영화 첫머리에서도 히치가타의 입을 빌어 신센구미를 ″미친 집단″이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일본의 어떤 감독도 마초이즘으로 똘똘뭉친 사무라이를 이렇게 조소하거나,동성애에 빠져 어쩔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로 묘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오시마의 마지막 작품이 된 [고하토].오시마의 최고작은 아닐지 몰라도, 그를 기억하기엔 충분한 수작임에 분명합니다. 




저의 한시절을 함께 보냈던 오시마 나기사가 80세 나이로 숨졌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죽음에 이어, 진정 한시대의 마감을 오시마의 죽음을 계기로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그의 제자인 최양일 감독이 한국언론과 인터뷰에서 "오시마 감독은 선조가 쓰시마(對馬)섬 출신이고, 본인도 대학(교토대 법학부) 재학 시절 재일동포 친구가 있었다는 인연 때문인지 유독 한반도와 재일한국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며 "한국의 영화 팬들이 1960∼1970년대 오시마 감독의 작품을 다시 한번 보면서 그의 문제의식을 재발견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의 영화들을 다시한번 봐야하겠습니다.

평생 반항적이었던 지식인 사무라이같았던 오시마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