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

마이클 무어..누락된 이야기(3)

bluefox61 2013. 6. 24. 17:04

진보주의자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가 한때 리처드 닉슨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외입니다. 그가 어떻게 닉슨 지지자에서 민주당 지지자로 바뀌게 됐는지가 이번 에피소드에 담겨있습니다. 닉슨의 마지막 유세를 직접 목격했던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밀후스, 3(Milhous, in Three Acts)

1: ‘닉슨이 그 사람(Nixon's the One)

 

미국의 선량한 가톨릭신자들은 케네디의 죽음에 대해 린든 존슨을 비난했다. 존슨이 실제로 암살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지만 존슨이 케네디를 증오했고, 케네디도 존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케네디는 인종주의적인 남부지역에서 표를 얻기 위해 존슨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존슨은 아둔한 남부 사람들과 달리 흑인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대통령이 된 순간 남북전쟁 이후 가장 중요한 인권법을 남부인들의 목구멍 속에 처넣기도 했다.

우리가 받아들 수없었던 것은 케네디가 존슨의 지역 주에서 살해당했으며,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위해 누군가 대비해야만 했다면 그것은 바로 린든 브레인 존슨이란 사실이었다. 196311월 이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머릿 속에는 앞으로 절대 댈러스로 휴가가는 일은 없으리라는 의식이 자리잡게 됐다.

JFK의 사망이후 9개월내에 존슨은 거짓말을 하면서 베트남전을 확대시켰다. 196484,그는 하루전 북베트남이 통킹만의 미국 해군 구축함을 공격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존슨이 엄청난 학살을 관장하면서,빈곤과의 전쟁 등 그가 남긴 기억할만한 업적들은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19683월 존슨은 대선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나는 그때 14살에 불과했지만, 이 모든 뉴스를 추적하면서 유진 맥카시나 바비 케네디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없었던 것은 부통령 계승자였던 허버트 호레이쇼 험프리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존슨의 베트남 정책을 충실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험프리는 대통령이 되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조이 비숍 쇼를 보고 있었는데, 조이가 방송 중 메모를 전해받더니 목이 막힌 듯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는 전날밤 캘리포니아 대선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한 후 총에 맞았던 로버트 F 케네디가 방금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내가 비명을 지르자, 이미 잠자리에 들어갔던 부모님이 그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오셨다.

너 안자고 TV 보면서 뭐하는거니?” 어머니가 물었다.

바비가 죽었어!”

세상에.”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오 주여, 오 주여.”

 

문 위 바로 거기에다 달아.” 솔트가 닉슨이 그 사람(Nixon's the One)’란 구호가 적힌 포스터를 붙일 자리를 지시하면서 말했다. “거기, 좋아.”

토머스 솔트는 세인트폴 신학교 내 닉슨지지 학생클럽을 이끌고 있는 4학년생이었고, 나는 신입생이면서도 이미 넘버투가 돼 솔트가 하기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시간주 새거노에 있는 세인트 폴 신학교 학생이었고, 악당 리처드 밀후스 닉슨을 지지하는 소수파였다. 그곳은 민주당 지지자(그들은 모두 가톨릭이었으며 닉슨은 선거에서 우리의 유일한 가톨릭 대통령에게 패한 악마였다)들의 안식처였으며, 신학교 전체가 험프리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 하지만 솔트와 나, 그리고 용감한 몇몇은 아니었다. 소속정당과 상관없이, 우리는 전쟁광을 지지하지 않았다.

우리라고는 했지만 과연 진정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 빼고 나머지 4명은 잘사는 공화당지지 집안 출신이었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기업 변호사나 다우케미컬 중역, 자동차회사 간부였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닉슨을 좋아했던 것같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도덕적 이유 때문이었다 -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면서 도덕적이란 단어를 사용하는게 좀 이상해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죄송하다 - 선택의 여지가 있긴 했다. 독립 대선 후보로 출마한 조지 월리스(George Wallace: 60년대 미국 앨러배마주지사.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인종차별철폐를 반대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논란이 되자 민주당을 탈당해 아메리카 독립당을 창당해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 역자 주)가 있었다. 플린트 출신인 돈 리글 하원의원은 닉슨으로 전쟁을 끝낼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었다. 닉슨은 대선 후 6개월내에 베트남전이 끝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말대로 되긴했다. 1972년 닉슨이 재선에 성공한 후 6개월만에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당시엔 닉슨이야말로 평화 후보였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닉슨은 투표연령을 18세로 낮추는데도 찬성하고 있다. 그는 환경보호국(EPA)을 창설하고, 학교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을 차별하는 행위를 불법화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음침하고 미덥지 못한 캐릭터여서, 본능적으로 그가 기르는 개 체커스만큼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래도 닉슨은 전쟁을 끝내겠다고 했다.

신학교 캠퍼스에서 닉슨지지 캠페인을 하는 한편 , 토요일 오후엔 새거노에 있는 블루칼라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용감하게 캠페인을 계속해갔고, 모두가 트리키 딕(Tricky Dick : ‘교활한 딕이란 의미. 딕은 리처드의 애칭이다 - 역자 주)이라고 부르는 남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시 나는 신학교 신입생이었기 때문에 캠퍼스 밖에서 닉슨 캠페인을 하려면 특별 허가를 받아야했다. 허가를 받는 조건으로 나는 교구의 제임스 히키 보좌주교(전 신학교장이기도 했다)의 자택에서 약간의 허드렛일을 하게 됐다.

때는 196810월초였다. 내가 할 일을 주교님의 야외 풀장청소를 돕는 것이었다. 히키 주교는 10여년전 신학교 설립에 간여했던 분으로, 신학교장을 떠난 이후에도 학교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우리가 리처드 닉슨 캠페인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자네가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들었네.” 풀장 안쪽을 대걸레로 닦고 있는데 주교님이 내게 말했다.

, 주교님. 저희 가족은 항상 정부 일에 관심을 기울여왔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왜 닉슨이지?”

그때 나는 풀장을 어떻게 치우는지 몰라서 당황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교님에게 대답을 잘못해 사제직이 굿바이될까봐 좀 걱정스러웠다.

전쟁은 잘못된 것이잖아요. 사람은 살해하는 것은 나쁜 짓이예요. 닉슨이 전쟁을 끝낼 겁니다.”

지금 당장 그런다는 말인가?” 주교는 철테안경너머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그렇게 말했어요. 6개월이면 전쟁도 없어지게 된다고요.”

자네 알고 있나? 그 남자는 - 어떻게 말해야하나?- 진실을 말하지 않은 전력이 있단다.”

큰일났다. 이제 주교님으로부터 리처드 닉슨을 도움으로써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말을 들을 판이었다.

그 사람이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주교님이 계속 말했다. “경쟁자인 여성후보에 대해 진실이 아닌 것들을 만들어냈단다(닉슨이 중도 진보성향의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 헬렌 거해건 더글라스를 극좌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쳐 승리한 것을 가르킴 - 역자 주). 아주 끔찍한 것들이었지. 사람들은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그는 이미 상원의원이 된 상태였거든.”

나는 주교님이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10월에 기온이 뚝 떨어졌는데 호스에서 나오는 물을 맞는 바람에 춥고 싫었을 뿐이었다. 그런 설교는 듣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 주교에게 수영장이 뭣 때문에 있는거지? 그런 생각이나 했다.

저는 몰랐어요.” 내가 공손하게 답했다. “1960년에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거든요.” 주교님이 그만하시기를 바라며 말했다.

“1960년에 몇 살이었나?”

“1학년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도 기억납니다.”

외울 수있겠나?”

물론 할 수있다. 지난 수년간 부가점수를 받기위해 수녀님들 앞에서 그 연설문을 외우곤 했으까.

조금 들려주게나.”

그래서 나는 손에 대걸레와 물기제거용 고무롤러를 든채 서서 주교님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암송했다.

 

이제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모든 형태의 빈곤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자신의 손안에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투쟁 목표로 삼았던 혁명적인 신념, 즉 인간의 권리는 국가의 관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손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은 여전히 전세계에서 쟁점으로 남아있습니다.”

 

주교님이 좋아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케네디 액센트로 다른 부분을 외우기로 했다.

 

집단적 궁핍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전세계의 빈민과 촌락민들에게 맹세합니다. 아무리 많은 시일이 걸리더라도 그들이 스스로를 도울 수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요, 그들의 표를 얻고자 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사회가 궁핍한 다수를 돕지 못한다면, 부유한 소수 또한 지킬수 없습니다. ”

 

아주 인상적이야.” 주교님이 인정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중요한 말이란다. 절대 잊지 말아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

자네에게 어떻게 투표하라고 말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오늘 자네가 내게 암송해줬던 그 말들을 제발 곰곰이 생각해보게나.”

 

전쟁은 물론 닉슨이 당선된 후 6개월만에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확대됐다. 미국은 다른 나라(캄보디아)까지 침략했고, 반전운동단체와 언론인들을 감시했으며, 1972년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전쟁발발후 떨어뜨렸던 폭탄보다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에 투하했다. 300만명이 넘는 동남아시아인이 사망했고, 58000명이 넘는 미군병사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주교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훗날 나는 주교님이 내게 수영장 청소가 아니라 머리 청소를 시키셨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봄 히키 주교님은 로마로 갔고, 클리블랜드 주교를 거쳐 마지막에는 워싱턴DC 교구의 추기경에 오르셨다. 그분이 엘살바도르에 파견한 여성 선교사 2명은 다른 2명의 종교인과 함께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는 현지 정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DC에서 추기경은 니카라구아와 엘살바도르에서 벌이고 있는 미국의 전쟁에 대해 거리낌없이 반대발언을 했다.

1년 뒤 신학교를 떠나며, 나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내가 리처드 밀후스 닉슨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던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2: 일립스의 말들(Horses on the Ellipse)

 

워싱턴에 동생 데려가지 마라.” 아버지가 식사테이블에 앉아 말했다. “안돼. 데려가면 안된다.”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나는 18살이고 성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대로 할 수있지만, 여동생 앤은 17살이고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닉슨이 대통령 재임 취임식을 하는 날 열리는 대규모 반전데모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워싱턴DC에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 교회 청년지도자들인 게리 우드와 필리스 발데스, 두사람 친구 피터 케이스, 내 친구 제프 깁스, 그리고 앤이 함께 차를 타고 갈 계획이었다.

저녁식탁에서 앤의 문제를 놓고 가족간의 싸움이 가열됐다. 모든 주제들에 대해 거리낌없이 의견이 오고갔다. 전쟁, 장발, 기타연주 미사, 우리 동네 출신인 존 싱클레어(John Sinclair : 미시간주 플린트 태생의 시인 - 역자 주), 플린트에서 열리는 웨더맨(Weatherman : 1969년 결성된 미국 극좌 지하 청년조직 - 역자 주) 집회, 우리집 지하벽에 그린 평화 사인, 이 모든 것들이 막내 여동생 베로니카에 미칠 영향 등등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 앤이 자기는 워싱턴DC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바람에 토론은 중단됐다. 침묵이 이어졌고, 그것으로 저녁식사도 끝났다.

한밤중이 되기 전에 우리 일행은 DC 외곽에 사는 패트 삼촌에 집에 도착했다. 우리는 자지 않고 그날 할 계획을 세웠다. 토론집회도 있었고, 내셔널성당에서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및 유진 매카시 연설과 함께 레오나드 번스타인 지휘로 평화를 위한 기원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다음날 저녁 성당에 도착한 우리는 입장하려고 모여있는 인파의 규모에 충격을 받았다. 대기하는 줄이 1.6km 정도 이어지는 것같았다. 도저히 들어갈 방법인 없었는데, 그때 피터가 아이디어를 냈다.

나만 보고 있어봐. 한명씩 와서 나한테 붙어.” 그가 말했다.

피터는 가방에서 땅콩 봉지를 꺼내 들고 줄 앞으로 나가, 친절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찾아 땅콩을 권했다. 유쾌한 대화가 오갔고, 그 남자가 자기를 위해 자리를 맡아주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우리 다섯명이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한명씩 앞으로 갔다. 우리가 하는 모든 계략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줄에 서있다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너희들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지금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 남자는 내 양심을 찌르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이런 식으로 새치기를 해서 먼저 온 사람들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뺐는게 옳다고 생각하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그 사람은 거기 없고 우리는 있는 것처럼 굴었다.

굉장하네.” 남자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스스로 할말이 없는거니? 더구나 여긴 교회잖아.”

우리 모두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웠다. 우리가 한 짓은 잘못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966km나 운전을 해서 온 터라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최소한 상관하지 않는 척 했다. 우리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꾸짖는 소리를 들고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는 얼른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콘서트는 너무나 달랐다. 번스타인의 지휘로 내셔널 심포니와 다른 오케스트라들이 합동으로 하이든의 전시의 미사를 연주했다.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내 주변에 앉은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글과 시가 낭독됐고, 그 자리에 있었던 2500(성당 잔디밭에서 커다란 스피커로 들은 또다른 2500)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취임식 날, 의회로 향하는 닉슨이 탄 차라도 구경하기 위해 우리는 일찍부터 거리로 나가 기다렸다. 보안이 아주 철저했지만, 우리는 길 가 쪽으로 다가가 무장한 자동차가 보이자 야유를 하며서 닉슨이 볼 수있도록 표지판을 들어올렸다. 닉슨이 지나가면서 손을 흔들었고, 우리도 손을 흔들기는 했는데 손가락을 다 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신학교시절과는 달라졌다.

워싱턴 기념탑 근처 일립스에 열린 집회는 이전의 반전집회만큼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7500명 이상이 참가했다. 내가 가본 집회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으며, 격렬하고 분노에 찬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닉슨과 그의 흉악한 방식에 넌덜머리가 난 상태였다. 우리는 워싱턴 기념탑 아래 언덕 위에 서서 시위대와 백악관을 바라보면서 닉슨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기를 바랬다.

약 두시간 후, 시위대 일부가 좀더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기념탑이 50개의 미국기로 둘러싸였다. 일부 학생들은 국기를 거꾸로 해서 감싸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 내셔널 공원 경찰들이 엄청난 숫자로 배치돼있었으며, 곧 강화 명령이 내려져 기마경찰까지 투입됐다. 말을 탄 경찰 수십명이 기념탑을 향해 언덕을 올라왔다. 우리는 부차적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기마경찰은 들고 있는 곤봉으로 보이는 족족 가리지 않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언덕아래 쪽으로 뛰어 내려갔고, 경찰이 그 뒤를 좇았다. 나는 그때 만해도 인간이 말보다 빨리 뛸 수있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그야말로 우리는 그 언덕을 총알처럼 뛰어 내려갔다. 내 바로 뒤에서 말 소리가 들리는 순간, 즉시 말이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할 수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멈춰 서는 것이었다.

달려가던 나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런데 말은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말이 추적할 다른 시위대들은 많았다. 나는 내 뒤를 따라오던 친구들에게 시위군중 오른쪽으로 빠져나가서 경찰이 없는데로 가라고 소리질렀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면서 이제 시간이 다 됐고, 우리 주장을 나타내기 위해 할만큼 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악관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너 창가에 서있는 그 사람 봤어?” “ , 본거같애.”) 그리고 나서 미시간으로 돌아갔다.

 

3: 배드 액스 (Bad Axe)

 

나는 닉슨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고, 그에 반대해 시위를 벌였다. 이제 나는 종결을 원했다. 굿바이하고 싶었다.

닉슨이 백악관에 남아있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1974년 늦은 봄,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사 침입사건과 상원 워터게이트 청문회, 존 딘(John Dean : 1970~73년 백악관 법률고문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에 깊숙이 개입했던 인물. 워터게이트 사건을 축소은폐시키려는 계획을 닉슨 대통령이 알고 있었다고 상원 청문회에서 폭로했다 - 역자 주)의 폭로, 닉슨이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를 녹음했다는 알렉산더 버터필드(Alexander Butterfield : 닉슨 행정부 백악관 부보좌관 - 역자 주)의 증언, 백악관의 지시로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 : 미 국방부 정보분석가로, 국방부가 1964년 베트남전 확대를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음을 보여주는 기밀문서인 일명 펜타곤 페이퍼1971613일 뉴욕타임스에 폭로한 내부고발자 - 역자 주)의 심리상담가 사무실이 침입당한 사건, 닉슨의 연방 대법원 패배( 19747월 워런 버거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만장일치로 백악관에 대해 대통령집무실 대화 녹음테이프를 특별검사에게 제출하라는 판결을 내린 일을 가르킨다 - 역자 주), 펜타곤 페이퍼의 공개, 닉슨의 모든 은폐 시도 등이 벌어진 이후, 리처드 밀후스 닉슨은 정치적 운명이 한줄의 실에 겨우 매달려있는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미시간주 플린트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 세 곳을 방문했다.

닉슨은 술마시고 벽에 걸린 오래된 그림들과 대화나 하며 백악관 안에서 숨어 지냈고 밖에 나가 대중들과 함께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 대중의 다수는 닉슨이 자진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든가, 헌정사상 최초로 쫓겨나가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파이터였던 그는 이전에도 여러번 모든 운이 다한 상황에서조차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요바 린다 출신의 딕 닉슨이었고, 운명에 맞서는 사람이었다.

기자회견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모든 사기꾼들의 주문)“고 주장했던 그는 원수’‘유대인이라고 불러온 언론을 제끼고 자신을 사랑하는 조용한 다수와 직접 접촉하고자 했다.

19741월 닉슨이 연방법원 판사 자리에 공화당 하원의원 제임스 하베이를 지명하면서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다. 공석이 된 하원의원을 뽑기 위한 선거가 치러지게 되자, 닉슨은 견고한 공화당 지지지역인 미시간이야말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완벽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곳으로 가서 드디어 그 남자를 만나 물러나라고 요구하기로 결심했다. 197440일 친구 제프와 여동생 베로니카, 그리고 나는 차를 몰고 미시간주 배드 액스로 갔다. 이 작은 마을에서 닉슨은 자신의 임기내 마지막이 될 선거유세에 모습을 드러낼 참이었다.

배드 액스는 미시간 휴론 카운티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었다. 법원과 극장이 있고 드넓은 농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배드 액스 남쪽에 있는 농장들 중 한 곳이 오클라호마 테러사건의 범인이 티머시 맥베이가 테리 니콜스,니콜스 남동생과 함께 함께 테러를 일으키기 전 머물렀던 곳이다).

휴론 호수로 삼면이 둘러싸인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그 곳은 미시간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로 그득했다. 얼마나 보수적이었냐고?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진보주의자를 찾으려면 호수를 건너 캐나다로 가야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배드 액스를 방문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온 마을에는 미국 최고 악당을 맞이하기 위해 성조기의 붉은색,흰색, 푸른색 기장 장식들로 뒤덮여있었다. 닉슨을 위한 퍼레이드가 계획된 곳에서 우리도 환영파티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배드 액스에 도착해보니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만은 아니었다. 닉슨이 도착하기만을 열렬하게 기다리는 약 1000명의 배드 액스 주민들 사이에는 최소 300여명의 시위대도 있었다.

나는 마을의 메인 스트리스트에서 커브 지점의 좋은 자리를 발견했다. 거기에서 커다란 대문자 활자로 닉슨은 사기꾼이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서있었다. 제프와 베로니카는 지금 탄핵’ ‘전범이라고 쓴 표지판을 들었다. 기본적이고, 직설적인 내용이었다. 애매모호함도 없었다. 닉슨이 지나가다가 읽을 수있게 짧기도 했다.

우리 주변에 서있던 지역주민들은 표지판을 가리려고 애썼지만 300여명의 동료 시위대원들이 함께 하고 있어서 우리를 쫓아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민들은 우리에게 아웃사이더들은 집으로 가라!”“히피들을 지옥불에!” 라고 소리쳤다. 그것 역시 짧고,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폭력사태는 빚어지지 않았다.

약 한시간쯤 후 퍼레이드/모터사이틀 행렬이 휴론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방용 트럭과 경찰차, 마칭밴드, 치러리더, 보이스카우드, 미국의 미래 농업인 등으로 이뤄진 행렬이었다. 컨버터블 자동차 위에 시장과 공화당 하원의원 선거 후보 제임스 아무도 몰라스팔링이 앉아 환호하는 군중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닉슨이 원했던게 이것 - 감정적 지지-이었다면, 바로 배드 액스야말로 적합한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탄 리무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닉슨은 차 안에서 일어서서 선루프 밖으로 몸을 내밀고 낡은 도깨비상차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유명한 닉슨 미소를 지으면서, 두 번째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으로 승리의 브이자 사인을 만들어보였다. 우리는 닉슨으로부터 약3m도 채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닉슨이 지나가면서 분명히 볼 수있도록 표지판을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가 봤다. 자동차는 시속 약 8km도 안되는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지나갈 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도 내 눈을 똑바로 봤다. 모든 것이 즉시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같았다. 그는 멜빵바지를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를 나를 바라봤다. 나도 그를 봤다. 너무 두껍게 화장을 하는 바람에 얼굴이 돌처럼 굳어진 오렌지로 만든 판처럼 보였고, 오만상 위에 씌운 회반죽 때문에 미소를 지으려는 시도로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아파 보였다. 아주 많이 아픈 것같았다. 이런 모습을 보게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천국문을 지키고 있는 성베드로에게 설명해야하겠지만, 그 순간 나는 슬픔을 느꼈다. 그는 마치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표를 모으기 위해서 끌려나온 시체같았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 극중 연기자들이 자기가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도중에 어느 순간 관객을 놓쳐버려서 끝까지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배드 액스를 방문한 닉슨이 바로 그랬다. 하원의원, 상원의원,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에 오른 남자, 세계 지도자들과 만나고 북 베트남에 원자폭탄 투하를 고려했던 남자, 정상을 향해 여러번 손으로 헤치고 나가고 기어올랐던 남자가 자신이 한번도 본적도 없는 곳에 찾아와 사진에 찍힐 기회를 얻으려고 지금 폰티액 자동차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속는 사람은 없었다. 배드 액스를 찾은 닉슨은 중국을 방문했던 닉슨이 아니었다. 부서지고 굴욕적인 모습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그게 다였다.

닉슨은 사기꾼이란 표지판을 내려다본 그는 시선을 돌려 괜찮은 척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 옆에 또다른 표지판이 있었고, 비슷한 표지판 297개가 이어졌다. 내 표지판을 본 그의 슬픈 반응을 본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로 내렸다. 이미 쓰러져있는 사람을 발로 차고 있다는 수치심이 들었다- 그는 무자비하고 비열한 사람이었지만 모욕을 당하고 외로운 남자였다. 그가 갈 길은 고향인 오렌지 카운티로 돌아가든가 교도소로 가는 것뿐이었다. 배드 액스에서 수천명의 환영객들에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불과 몇주 뒤에는 진짜 도끼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질 판이었다. 공화당 소속의 미시간 주지자 윌리엄 밀리켄조차 닉슨과의 퍼레이드 참석을 거절했다. 밀후스는 버림받은 사람이었고,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있었다. 이 국면에서 포인트가 무엇이냐고?

말해보겠다. 닉슨은 전쟁을 끝내겠다고 말했다 - 그는 자신이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대신 미국 청년 2만명을 더 보내 죽음을 맞게 만들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너무나 많은 폭탄을 쏟아부어, 지금까지도 사망자 숫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 알 수없다(200만명? 300만명? 400만명? 홀로코스트 희생자 숫자와 맞먹을 정도이다. 만약 당신이 세금을 냈으며 전쟁을 지지한 사람이라면 아마 토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는 너무도 가증스런 전쟁 범죄를 저질러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그 유산을 지닌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와 함께 도덕적 나침반을 잃었으며, 아직까지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우리가 좋은 사람인지, 언제 테러리스트인지 더 이상 알 수없게 돼버렸다. 역사는 이미 미국의 종언을 기록한 상태이며, 그 시작을 베트남전과 닉슨으로 말할 것이다. 베트남 이전에는 너무나 많은 희망이 있었지만 닉슨 이후에는 영속적 전쟁만이 존재했다.

그런 이유에서, 그 당시에는 미국이 어찌 될지 몰랐지만, 나는 표지판을 다시 들어올렸다. 나는 그런 미국과 닉슨을 결코 원치 않았다.

우리는 닉슨이 연설하는 곳으로 걸어갔지만 경찰이 접근을 막고 있었다. 닉슨은 스피커를 통해 연설하면서 자신이 지역 농부들에게 지급한 보조금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관중들에게 의사가 자기 환자를 위해 일해야하는가, 아니면 정부를 위해 일해야겠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다음 그 곳에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연설했다.

나는 여러분께 영구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여러분은 1세기만에 전쟁을 모르는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은 25년 넘는 기간동안 징집당하지 않는 첫 번째 18세군이 될 겁니다!”

관중들은 갈채를 보냈다. 닉슨은 평화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큰 소리로 야유를 퍼부었다. 울부짓음같은 소리였다. 닉슨은 몇 달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다시는 유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유세를 목격했던 것이다.

만약에 미국의 마지막 전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