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지구촌 전망대

버마를 추억하며

bluefox61 2007. 10. 5. 14:29

버마에 대한 기억은 아주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구가 뭔지도 몰랐던 나이였는데, 그 때 흑백TV로 중계됐던 국제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와 경기를 벌인 한 나라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졌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른바 ‘박스컵(정식명칭은 박정희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에서 한국과 맞서 싸우던 나라는 바로 버마였다. 그 나라 남자들은 치마를 입고 다닌다더라는 어른들의 말이 신기하게만 들렸다. 

자료를 뒤져보니, 1971년도 제1회 박스컵축구대회부터 3회때까지 한국팀은 버마와 맞붙어 번번이 패배의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한국팀의 연이은 버마 굴욕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한숨과 눈물을 쏟아냈고, 신문마다 대표팀을 질타하느라 난리가 났었단다. 축구와 레슬링이 사실상 유일한 국민적 오락거리였던 때의 이야기다. 



버마란 이름이 또다시 우리 국민에게 눈물을 안겨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이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의 당시 수도 랑군(현재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했다.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국제사회의 인정이 필요했던 전두환 대통령이 서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 첫 방문지로 버마를 택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20여년전인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정권과 일종의 정서적 유대감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은 미얀마로 불리는 버마는 한국과 역사적 인연이 적잖은 국가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정에서 아웅산 등 투사들이 암살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던 것도 우리의 독립투쟁사와 비슷하고,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점령기 때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던 것도 같다. 

수차례에 걸친 쿠데타와 군부정권, 광주민주화운동과 비슷한 1988년 8월 8일 유혈항쟁에 이르면 마치 우리의 70, 80년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그런가하면, 아시아에서 단 두명 뿐인 유엔 사무총장이 버마의 우탄트(1961~71년)와 한국의 반기문이란 사실도 뜻깊다. 다만 한국은 80년대의 치열한 민주화 투쟁을 거쳐 이제는 군부통치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민주국가로 성장했고, 버마는 여전히 철권통치하의 열악한 경제상황에 빠져있다는 점에서 두나라는 완전히 상반된 길을 가고 있다. 


옛 버마에서 요즘 매일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한 것뿐이다. 며칠사이 군·경찰의 경계태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브라힘 감바리 유엔특사가 떠나자마자 시위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한 심야 수색작전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뉴스도 전해지고 있다. 


지난 주 일요일, 서울 한남동을 우연히 지나다가 국내 체류 버마인들과 한국시민단체 회원들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주한 미얀마대사관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시위대열은 전경들과 차량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도 불과 20여년전에는 버마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한국은 군부정권이 일방적으로 도입한 미얀마란 새 국호를 받아들이고, 현지 인권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회피하는 국가들 중 하나가 돼있다. 국익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혹독한 민주항쟁기를 통과해온 바로 이 땅에서 버마인들의 시위가 억눌림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버마는 가난한 나라다. 하지만 영국의 끈질긴 점령기도에 맞서 수십년동안 수차례 전쟁까지 벌였던 저력있는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버마가 제2의 한국이 되는 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