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

내가 몰랐던 역사1 - 성냥은 어떻게 발명됐을까

bluefox61 2021. 3. 2. 09:27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가 불려지던 때가 있었다.노래는 “인천에 성냥 공장 성냥 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갑 두갑 일주일에 열두갑 팬티 속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란 가사로 시작된다. 여성비하적인 낯뜨거운 구절 때문에 남정네들이 술집에서 낄낄거리며 불어제끼곤 했지만, 사실 이 노래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 성냥갑을 훔쳐 속옷 속에 숨겨가지고 나와 팔아야만 할 정도로 저임금에 혹사당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성냥은 1880년대에 개화승을 자처하던 이동인이 일본에서 ‘신문물’ 성냥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우리나리에 전해졌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동인을 일본의 조선침략에 부화뇌동한 친일파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성냥과 비슷한 ‘석류황(石硫黃)’이 있었다. 가는 소나무 가지에 유황을 찍어 말린게 바로 ‘석류황’이다. ‘유황을 돌처럼 굳혀 불을 붙이는 도구’란 뜻의 석류황이 음운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성냥’이 됐다.

 

우리나라 성냥의 역사에서 인천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지난 2019년 인천에 개관한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에 따르면, 1886년 제물포에 있는 세창양행 무역상사가 일본으로부터 성냥을 수입해 국내에 팔았고, 1917년에는 인천에 첫 성냥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가 문을 열었다.인천에 성냥공장이 세워진 이유는 압록강 일대에서 생산된 목재를 바닷길을 이용해 쉽게 운송할 수있는데 다가 공장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전력수급이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인천하면 곧 성냥공장을 떠올릴 만큼 성냥은 인천 제조업의 중요한 불씨노릇을 했다. 하지만 해방후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성냥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섰고, 국내 최초의 성냥공장 조선인촌회사는 결국 1960년대에 문을 닫는다.지금은 전국에 불과 몇 개의 성냥공장만 남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불씨를 만들어라”

 

인류문명의 역사는 ‘불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몰래 전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불은 곧 빛이자 문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불씨지키기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인간이 불을 사용한 시기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던 142만 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인간은 돌을 서로 부딪히거나 나뭇가지를 비벼 얻은 불씨로 불을 피워 추위를 피하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쇳조각을 돌과 부딪혀 불씨를 얻는 방법도 사용됐다

 

지난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에 위치한 외츠탈 Ötztal  알프스 빙하에서 약 5300년 전에 사망한 남성 미라 발굴됐다. ‘아이스맨 Iceman’이란 별명을 가진 이 남성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전신에 61가지 문신을 그린 상태였으며, 어깨에 화살을 맞아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남성은 부싯돌 단검과 금속 도끼를 지니고 있었고, 그의 주머니 속에서는 말굽버섯 조각들이 나왔다. 이 버섯은 한번 불이 붙으면 잘 꺼지지 않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불씨를 보관하거나 옮길 때 또는 불쏘시개용으로 사용돼왔다. 미라 남성도 생존에 필요한 불을 만들기 위하여 이 버섯을 불쏘시개로 쓰거나 차로 달여 마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나긴 불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불씨지키기의 고난으로부터 해방되기는 고작 200년도 채 안된다. 영국의 약제사이자 발명가인 존 워커 John Walker가 1827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냥을 제품으로 내놓으면서 비로소 언제 어디에서나 불을 피울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됐다.17세기 때부터 유럽에서는 불꽃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물질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독일의 연금술사 헤니히브란트 Hennig Brandt도 그런 연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669년에 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소변을 모아 증발시키던 중 빛을 내는 신비한 물질을 발견했다. 바로 ‘인’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브란트가 모든 것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현자의 돌’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아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인천에 세워진 성냥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란 이름에 ’인‘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은 성냥 원료로 인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고체상태의 인은 원자배열에 따라 4종류로 나뉜다. 액체 또는 기체 상태의 인이 고체로 응결된 것이 바로 백린(white phosphorous) 또는 황린(yellow phosphorus)이다. 약 35도의 기온에서 자연 발화할 정도로 인화성이 매우 크다.두번째는 적린(red phosphorus)으로, 백린을 진공상태에서 300도로 가열해 얻을 수 있다. 그 자체로는 독성이 없고, 원자들이 사슬로 연결된 고분자형태여서 안정적이다. 세 번째 자린( violet phosphorus)은 적린을 550도 이상 가열하면 얻을 수 있다. 네번째 흑린(black phosphorus)은 백린을 12000기압에서 200도로 가열하면 만들어지는데 가장 안정적이다.브란트가 발견한 백린은 쉽게 불을 만들 수있다는 장점을 가졌지만, 인간의 체내에 축척돼 결국에는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독성을 가진 물질이다. 쉽게 불을 통제할 수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인류 최초의 자기 발화식 성냥은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탄생됐다. 화학자 장 샹셀 Jean chancel이 1805년 가는 나뭇조각의 끝에 염소산칼륨, 황, 설탕, 고무 등을 바른 다음 성냥머리를 황산에 담가 발화시키는 방식을 고안해낸 것. 그러나 불편하고 위험했을 뿐 아니라 너무 비싼 가격, 그리고 황이 탈 때 나는 심각한 냄새 때문에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성냥머리를 물체의 표면에 마찰시켜 불꽃이 일어나게 만든 성냥은 1826년에서야 등장한다. 영국 발명가 워커가 염소산칼륨과 황화안티모니를 발화 연소제로 쓴 성냥머리를 유리조각과 규조토를 바른 종이 사이에 넣어 잡아당겨 불씨를 만들어내도록 한 성냥을 고안해낸 것이다. 이듬해 워커는 성냥개비들과 샌드페이퍼를 상자갑에 함께 넣어 약국 등을 통해 팔기 시작했다. 성냥을 뜻하는 영어단어 ‘매치(match)’은 워커가 발명한 성냥이 샌드페이퍼와 짝을 이루고 있는데에서 나왔다. 워커는 자신의 성냥 제품에 콩그리브스(Congreves)‘란 이름을 붙였다. 1806년 오늘날 로켓의 모태가 된 일명 ’콩그리브 로켓‘을 발명해 영국 국방력 강화에 혁혁한 공헌을 세운 윌리엄 콩그리브 William Congreve에게 성냥을 헌정한 것이다. 50개의 성냥이 들어있는 성냥갑 1상자의 가격은 1실링.. 1800년대 초반 영국군 병사의 하루 평균임금이 1실링이었다고 하니 꽤 비싼 가격이었던 셈이다.

 

워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특허를 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성냥머리 제조에 들어가는 화학물의 배합공식도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뮤얼 존스 Samuel Jones란 사람이 워커의 성냥을 그대로 모방해 1829년 ‘루시퍼스( Lucifers)’란 성냥 제품을 선보이면서 성냥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루시퍼’는 라틴어로 ‘빛을 가져오는 사람’이란 뜻이며 악마를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다.1830년에는 프랑스 화학자 마르크 샤를 소리아 Marc Charles Sauria가 발화연소제로 백린을 사용한 성냥을 선보인다. 염소산칼륨과 황, 백린과 고무를 섞어 성냥머리를 만들고, 마찰면에 이를 그어 불을 켤 수있게 만든 것. 백린 성냥은 유럽에서 빠르게 대중화했다. 특히 황을 태울 때 생기는 악취가 현저하게 적었기 때문이다. 1833년에는 샌드페이퍼 대신 어떤 물체에라도 비비면 불이 붙은 백린성냥 제품이 선보였다.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구두굽에 그어 성냥불을 켜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백린성냥이다.1848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화학과 교수 루돌프 크리스티안 뵈트거 Rudolf Christian Böttger가 적린을 성냥머리가 아닌 상자갑의 마찰면으로 분리해놓은 안전성냥을 발명했다.성냥을 켜는 순간 마찰면에 칠해진 적린 성분 등이 성냥머리의 염소산칼륨과 순간적으로 결합하면서 마찰열에 의해 불이 붙고, 황의 도움을 받아 불꽃을 내는 원리이다. 오늘날 모든 성냥의 마찰면이 검붉은색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적린이 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경 유럽과 미국에서 성냥은 매우 흔하게 팔리는 물건으로 자리잡는다. 1845년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의 슬픈 동화 ‘성냥팔이 소녀’는 바로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탄생됐다. 헐벗고 굶주린 소녀는 추운 겨울날 눈내리는 거리에 서서 행인들에게 “성냥 사세요”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성냥을 하나도 팔지 못했는데.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한테 혼날 거야“라고 걱정한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소녀는 성냥을 하나씩 켜게 되고,을 보게 된다. 소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개 성냥을 켜 죽은 할머니를 보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뼈가 녹는 고통 당한 백린 성냥공장 여공들 

 

이처럼 성냥의 대중화 덕분에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크게 편리해졌지만, 그 뒤에서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성냥공장 또는 인 생산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사이에서 백린의 독성으로 인해 턱뼈가 변형되는 ‘인중독성괴저 phosphonecrosis, phossy jaw’환자가 속속 등장한 것이다. 백린의 치명성은 당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성냥머리를 삼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1857년 미국 외과의사 제임스 러시모어 우드 James Rushmore Wood는 한 논문으로 큰 관심을 모은다. 논문의 제목은 ‘아랫턱 전체 제거 수술 Removal of the entire lower jaw’. 이 논문에서 우드는 코넬리어란 이름의 16세 여성환자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와 치료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코넬리어 Cornelia는 뉴욕의 한 성냥공장에서 하루 8시간씩 2년반동안 일하던 중 오른쪽 턱뼈 아랫쪽에 종기가 생기는 병을 얻게 된다. 종기는 점점 커졌고 고름까지 나왔다. 통증은 물론이고 음식물을 씹어삼킬 수 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코넬리어는 1855년 12월 17일 뉴욕 벨뷰병원에 입원하기 불과 1주일전까지 생계를 위해 매일 성냥공장에서 일해야했다. 그는 결국 턱뼈 전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했다. 우드는 논문에서 미국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서도 코넬리어와 유사한 환자가 보고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냥공장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끔찍한 고통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40~50년대 영국 내 성냥공장의 안전 실태를 다룬 근로감독 보고서가 숱하게 나왔고, 소설가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가 성냥공장에서 사용되는 백린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1888년 런던의 성냥공장 ‘브라이언트 앤드 메이 Bryant and May’에서는 여공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에 반발해 파업을 벌였다. 일부 진보적인 언론들이 파업지지 선언을 하고 독자들을 대상으로 파업 노동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나섰는가 하면,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시드니 웹 Sydney Webb 등 저명한 페이비언협회 Fabian Society회원들이 파업 지지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결국 런던 노동위원회가 개입해 공장 작업환경의 개선을 이끌어내면서 파업은 마무리됐다.

 

성냥의 백린 위험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핀란드 정부는 1872년 백린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2년 뒤인 1874년에는 덴마크, 1897년 프랑스, 1898년 스위스, 1901년에는 네덜란드가 백린금지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1906년 9월 스위스 베른에서 체결된 ‘베른 협약 Berne Convention (정식 명칭은 ‘성냥제조에 있어 백린(황린)사용 금지에 관한 국제협약 International Convention respecting the Prohibition of the Use of White(Yellow) Phosphorus in the Manufacture of Matches) ’을 통해 성냥 제조시 백린의 사용이 국제적으로 금지됐다. 1980년 체결된 특정재래식무기 사용금지제한협정 The Convention on Certain Conventional Weapons은 민간인과 민간인이 집중된 지역에 위치하는 군사 목표물에 백린탄과 같은 무기의 사용을 금지했다. 1997년 4월 효력이 발생한 화학무기금지협약(정식명칭은 ‘ 화학무기의 개발 생산 비축 사용금지 및 폐기에 관한 협약 Convention on the Prohibition of the Development Production Stockpiling and the Use of Chemical Weapons and on Their Destruction’)은 “전쟁수행의 방법으로 화학물의 독성을 사용하는 무기를 금지한다”고 명문화함으로써 백린을 사용한 무기를 다시한번 금지했다.

 

백린탄은 수천도에 달하는 화염을 생성하는 소이탄의 일종으로, 가공할 살상력으로 인해 원자폭탄을 제외하고 '인간이 만든 최악의 무기'나 '악마의 무기' 등으로 불린다. 백린탄이 터진 주변의 공기를 마시면 호흡기에 치명상을 입고, 인체에 닿으면 뼈와 살이 녹는 끔찍한 부상이 생긴다. 국제법에도 불구하고 백린탄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9년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의 인구집중지역인 가자시티와 자발리야 Jabalia 난민촌 일대에서 다수의 백린탄을 투하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국제법상 용인된 무기만 사용한다”는 공식입장만 냈을 뿐 백린탄 사용자체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앞서 2006년에는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Hezbollah와의 전쟁 때에도 백린탄을 사용한 적이 있다. 2010년 시리아전쟁 발발이후 곳곳에서 백린탄 사용 의혹이 제기됐으며, 2019년에는 터키군이 쿠르드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 거주지역에 백린탄을 투하한 정황도 보고됐다.

생계를 위해 백린 성냥 제조에 내몰리는 노동자는 사라졌지만, 백린의 공포는 21세기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