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롬부스 Christopher Columbus(이탈리아 어로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Cristoforo Colomo)는 오늘날의 아이티인 히스파니올라 Hispaniola 섬에 상륙한 후 원주민들이 동그란 물체를 발로 차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물체가 발이나 땅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통통 튀어오르는 모습이 너무나도 신기했기 때문이었다.그 공은 가죽을 이어붙인 다음 지푸라기 등을 안을 채워 만든 유럽의 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492년 콜롬부스는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이 신기한 공을 가지고 유럽으로 돌아온다.당시 왕실역사기록관이었던 페드로 마르티르 데 앙기에라Pedro Mártir de Anghiera는 콜롬부스가 가져온 공에 대해 “어떻게 공중으로 그토록 튀어오를 수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유럽 궁정을 뒤집어놓은 고무 공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1528년 스페인 궁정에서는 신기한 장면이 펼쳐진다. 아즈텍 Aztec 제국을 멸망시키고 돌아온 악명높은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가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자랑스럽게’ 내어보인 것. 이 중에는 유럽인들이 처음 마셔온 초콜렛 음료도 있었다. 카를로스 1세 Carlos I (신성로마제국 황제 호칭은 카를 5세 Karl V)국왕과 귀족들의 시선은 코르테스가 궁정에까지 끌고 온 아즈텍 인들에게 쏠렸다. 아즈텍 인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작은 공을 사용한 전통게임 ‘울라마 Ulama’를 시연해보였기 때문이다. 울라마는 발 대신 허벅지와 엉덩이 등으로만 공을 처내는 놀이이다. 고무공을 이용한 ‘축구’가 유럽 최초로 정식 소개된 순간이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고무의 역사는 최소 30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BC1200년경부터 400년 전후까지 번성했던 올멕Olmec 문명의 ‘올멕’이란 단어 자체가 ‘고무나무 사람’이란 뜻이다. 고무나무 수액으로 만든 고무로 공을 만들어 ‘울라마’ 경기를 벌이는 것이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단어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BC 1200년 쯤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울라마 선수 점토 조각상이 멕시코에서 발굴됐는가 하면, 미국 애리조나 북부와 온두라스에선 1500개 이상의 울라마 경기장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올멕은 초기 메소아메리카 Mesoamerica 문명으로 아즈텍과 마야 Maya 등 후기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 고고학자 폰치아노 오르티스 Ponciano Ortiz와 마리아 델 카르멘 로드리게스 Maria del Carmen Rodriguez는 엘마나티 El Maniti 에서 올멕인들이 제사에 바쳤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뼈와 함께 나무 도끼, 도기, 옥구슬, 조각상 등을 대거 발굴했다. 특히 흥미로운 발굴품은 바로 십여개의 고무공들이었다. 크기는 직경 10~14cm로 다양했다. 연구팀은 이 공들이 BC1600 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무나무 사람’ 올멕 문명이 번성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무로 공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의미이다. BC 1200년 쯤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울라마 선수 점토 조각상이 발굴됐는가 하면, 미국 애리조나 북부와 온두라스에서는 1500개 이상의 울라마 경기장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이처럼 중앙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수천년 전부터 고무 나무에서 유액을 채취, 건조·응고시켜서 탄력이 있는 물질을 만들어 공이나 신발 혹은 항아리나 옷감에 발라서 방수용으로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천연 고무는 주로 남미 아마존 유역을 원산지로 하는 헤베아·브라질리엔시스(Heavea Brasiliensis)라 하는 고무의 나무에서 채취된 것이다. 고무의 나무에서 라텍스라는 고무분을 30~40wt% 함유하는 유액을 채취하여, 라텍스를 건조시켜서 생고무가 제조된다.우리가 쓰는 ‘고무’란 단어는 ‘나무 진’이란 뜻의 영어 ‘검(gum)’의 일본식 표현이다. 고무를 나타내는 또다른 영어 단어 ‘러버(rubber)’는 1770년 영국의 기계공 에드워드 네언 Edward Nairne이 중남미에서 가져온 천연 고무로 종이나 물체의 표면을 문지르면 쉽게 지울 수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문지르다’는 뜻의 영어단어 ‘럽(rub)’을 변형시킨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 수정을 하려면 빵조각을 사용했었다. 당시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y가 빵 대신 생고무를 문지르면 빵 보다 훨씬 쉽게 연필 자국 등을 지울 수있다고 극찬하면서 사용했던 것이 생고무 지우개(rubber) 탄생으로 이어지게 됐다.
고무에 미친 남자 굿이어
유럽에서는 중남미 식민지에서 가져온 천연고무로 방수 천, 신발, 의복 등을 만들어 널리 사용했다. 하지만 더운 날씨에 끈적끈적하게 녹아버리고 추우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천연고무의 성질은 골칫거리였다. 천연고무의 결점을 없애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 Charles Goodyear이다. 그는 한마디로 ‘고무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1839년 우연히 천연고무덩어리와 황을 혼합한 물질을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뜨렸다가 다음날 이 고무덩어리가 굉장한 탄성을 갖고 내구성도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굿이어는 1844년 1월 30일 고무가황법으로 특허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수차례 소송전에 휘말리는 등 고무가황법으로 생전에 큰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빚만 남기고 59세때인 1860년에 세상을 떠난다. 세계적인 타이어 회사인 굿이어는 사실 찰스 굿이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미국 사업가 프랭크 세이벌링 Frank Seiberling이 1898년 타이어 및 고무제품 회사를 세우면서 굿이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가져와 쓴 것이 바로 오늘날의 ‘굿이어 타이어’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고무 타이어를 발명한 사람은 영국 발명가 토머스 핸콕 Thomas Hancock이다. 본래 마차제조업자였던 핸콕이 고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마차덮개로 사용할 방수천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819년 고무로 실험을 시작한 그는 고무 코팅을 한 방수천을 발명하고 이 천을 가지고 장갑, 신발 등을 개발해내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고무로 만든 물통을 얇게 잘라낸 동그란 고무줄도 발명했다. 특이한 것은 굿이어가 고무가황법 특허를 받기 불과 8주전 핸콕도 영국에서 황을 이용한 고무 가공법 특허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친구 윌리엄 브로크든 William Brockedon이 1842년 미국에서 가져온 가황 가공을 한 고무 샘플을 보게 됐고, 이를 가지고 고무 가공 실험을 해 특허권을 영국에서 획득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 고무가공법에 ‘가황(vulcanization)’이란 단어를 붙인 사람이 바로 브로크든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대장장이 신인 ‘벌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핸콕은 1846년 마차의 나무 바퀴에 충격 방지용 고무를 부착하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하지만 통고무 타이어가 마찰열로 녹아버리는 단점을 해결하지 못해 실용화에는 실패한다. 고무가황법을 이용한 공기압타이어가 처음 개발된 것은 1845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발명한 로버트 윌리엄 톰슨 Robert William Thompson에 의해서이다. 톰슨은 1847년 3월 런던 리전트공원에서 일명 ‘공기 바퀴’를 단 마차로 주행실험에 해보였다. ‘공기 바퀴’를 단 마차는 기존 마차 보다 소음과 충격이 적었다. 특히 수km를 달려도 바퀴가 크게 파손되지 않았으니 그의 실험은 합격점을 받았던 셈이다. 하지만 공기압 타이어는 1888년 영국 발명가이자 수의사인 존 보이드 던롭 John Boyd Dunlop이 자전거용 타이어를 발명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실용화되기 시작한다. 이 타이어를 자동차용으로 개발한 사람은 프랑스의 에두아르와 앙드레 미슐랭Édouard,André Michelin형제이다.
고무 가공법이 이처럼 크게 발전한데다가 자동차까지 등장하자 고무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고무의 역사는 콜롬부스 이후부터 서구 식민주의 어두운 역사와 함께 해왔다. 유럽 상인들을 중남미 식민지에서 고무를 채취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처참한 강제노동에 동원했다. 1800년대 말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Léopold II(네덜란드어로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주장하면서 대규모 고무 농장을 세워 원주민들을 채취작업에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채찍질은 물론 살인까지 당하는 등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레오폴 2세는 1800년대 후반부터 1908년까지 벨기에 영토의 약 80배나 되는 드넓은 땅에 살고 있던 콩고 원주민들을 사실상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렸으며, 최소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가 ‘벨기에의 학살자’로 불린다. 그가 처음 착취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상아였다. 하지만 이내 콩고 땅 여기저기에서 자라고 있는 고무나무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 고무 수요가 크게 증가하자 레오폴 2세는 현지에 대대적인 고무농장을 세웠다. 군인들과 농장 관리자들은 국왕의 요구에 따라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고무채취 할당량을 부과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은 손이나 목이 잘렸다. 한 원주민이 할당량을 못채우고 죽으면 다른 가족이나 이웃들이 이를 채워야 했기 때문에 당시 콩고 고무농장은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못지 않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그 덕분이었던지, 1893년 250톤에 불과했던 콩고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 6,000톤으로 엄청나게 증가한다.그 수익은 물론 모두 레오폴 2세에게 돌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콩고에서 고무로 얻은 수익은 현재 가치로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콩고의 학살자’ 벨기에 국왕
콩고에서 레오폴 2세가 벌이는 이같은 만행은 같은 유럽인들에게도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현지를 방문한 선교사 등이 콩고 고무농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행을 유럽에 알리자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 Arthur Conan Doyle 등 유럽의 지식인들이 벨기에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1908년 벨기에 정부가 콩고를 식민화하면서, 국왕이 아닌 ‘국가의 재산’으로 인정하게 된다. 레오폴 2세는 콩고를 포기한 다음해 1909년에 사망했는데, 당시 벨기에 국민들까지 국왕의 관에 침을 뱉었다고 한다.
지난 2020년 6월 벨기에의 필리프 Philippe국왕이 콩고민주공화국(DRC) 독립 60주년을 맞아 펠릭스 치세케티Félix Tshisekedi 대통령에게 보낸 축하 서한에서 과거 벨기에가 가했던 폭력 및 잔혹 행위, 그리고 고통과 수모에 대해 사과했다. 벨기에 왕실이 콩고 식민지배의 과거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는 처음이었다. 필리프 국왕은 이 서한에서 레오폴드 2세에 의한 통치 시기를 언급하면서 "콩고가 독립할 당시에도 폭력과 잔혹 행위가 이뤄지며 고통과 굴욕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또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에 의해 되살아난 과거의 상처에 대해 가장 깊은 유감을 표하고 싶다"고 밝혔다.
필리프의 서한은 벨기에가 식민지 과거를 재평가하고 레오폴 2세 전 국왕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는 가운데 나왔다. 미국에서 흑인남성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의 사망으로 촉발된 인종 불평등에 대한 항의 시위를 계기로 벨기에에서는 식민통치 기간 중 수백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숨지게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레오폴 2세의 동상 여러 개가 파손됐다. 연방 의회는 벨기에의 식민지 과거를 조사할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오늘날 천연고무의 최대 생산지는 중남미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이다. 1970년 설립된 천연고무생산국협회(Association of Natural Rubber Producing Countries)에는 인도, 방글라데시,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등 12개 아시아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가입돼있다. 이중 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세계 천연고무 생산의 80%를 차지한다. 중남미를 원산지로 하는 고무나무가 동남아시아에 퍼지게 된 데에는 영국의 식민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70년대에 헨리 위컴 Henry Wickham이란 영국인이 브라질 고무나무 종자 약 7만개를 영국으로 몰래 밀반출했고, 왕실 식물원인 큐가든 Kew Garden의 식물학자들은 이를 키워 인도 등 동남아시아 곳곳으로 보냈다.
독립국인 브라질 정부의 눈을 피해 고무나무 종자를 대량으로 밀반출한 그의 행위는 엄연한 ‘도둑질’이었다. 더구나 한 개인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식물 도둑질’을 벌일 수있었던 데에는 영국 정부의 조직적인 지원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위컴은 동남아시아 영국 고무농장 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수여 받았다.
갈수록 늘어나는 고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20세기에 들어 합성고무를 만들어내려는 연구가 시작된다. 1909년 독일 화학자 프리츠 호프만 Fritz Hofmann이 이끄는 연구팀이 합성고무의 원료인 폴리소프렌(polyisoprene)을 최초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하지만 폴리소프렌은 천연고무에 비해 질이 떨어지고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10년 러시아 과학자 세르게이 바실리에비치 레베데프 Sergey Vasiievich Lebedev가 폴리부타디엔 Polybutadiene 이란 합성고무 원료를 개발했다.미국에서도 1931년 클로로프렌 Chloroprene을 이용해 합성고무를 만들었고, 1932년 듀폰DuPont사가 이를 상품화해 공급을 시작했다.
합성고무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2차세계대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Franklin Roosevelt 미국 대통령이 고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민간 사용을 제한했다. 방수포, 장화, 방독면, 고무 보트부터 전차, 전함 등에 이르기까지 고무는 반드시 필요한 소재였다. 영국, 프랑스가 식민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천연고무의 해외 수출을 통제하는데다가,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장악하면서부터는 천연고무의 공급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미국은 큰 난관에 빠지게 된다. 당시 정부는 국민들을 상대로 ‘고무 기부 캠페인’까지 벌였을 정도였다.미국 정부는 합성고무 개발 및 대량생산 기술에 국력을 집중했다. 그 덕분에 굿이어, US고무공업, 굿리치 그리고 파이어스톤은 1942년 한 해 동안 총 2241t의 합성고무를 생산했다. 최초 목표의 10배 정도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1945년에는 92만t의 합성 고무를 생산해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무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고무줄과 지우개부터 자동차 타이어, 전함,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쓰임새가 무궁무진한 물질이다.지난 1986년 1월 28일 전세계를 경악시킨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 Challenger호 폭발사건의 비극은 바로 고무 때문이었다. 오랜 조사 끝에 로켓부스터의 압력가스를 막는데 필요한 고무패킹인 오링(O Ring)의 합성고무가 당초 예상보다 추운 날씨에 탄성을 잃어 제기능을 하지 못했던게 원인으로 드러났다. 오링의 틈새로 새어나온 고온 고압의 연료에 불이 붙었고,그것이 연료탱크 아래쪽에 있는 액체수소로 옮겨 붙어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챌린저호의 공중분해로 이어졌다. 고무의 탄성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부족 또는 실수가 비행사 7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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