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

내가 몰랐던 역사 11-태초에 가짜뉴스가 있었다...길고 긴 그 역사

bluefox61 2021. 6. 4. 14:33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만들어 뿌린 가짜 신문

 

1782년 4월 22일, 프랑스 파리 외교가에 ‘서플리먼트 투 더 보스턴 인디펜던트 크로니클 Supplement to The Boston Independent Chronicle’란 신문이 뿌려졌다. 1면에 실린 기사는 가공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국의 조지 3세 George III 국왕이 미국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인디언 원주민들을 내세워 양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증거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독립군인들이 최근 커다란 꾸러미들을 발견해 열어보니 무려 700명이 넘는 미국인 남녀와 어린이들, 심지어 아기들의 머릿가죽이 들어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기사는 보스턴에서 실제 발행되는 인디펜던트 크로니클 3월 12일자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싣는 형식으로 돼있다. 기사에 따르면, 뉴잉글랜드 독립군 소속의 새뮤얼 게리시 Capt. Samuel Gerrish대위는 3월 7일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정찰 작전 중 백인들의 머릿가죽이 담긴 꾸러미들을 발견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전했다. 대위는 전리품을 얻었다는 생각에 처음엔 기분이 좋았지만, 꾸러미들을 열어본 후 놀라 자빠졌었다고 밝혔다. 그는 8개의 꾸러미 안에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외곽에 사는 세네카 Senneka인디언들이 지난 3년간 모은 우리의 불행한 양민들의 머릿가죽이 들어있었다”면서 “인디언들은 이 꾸러미들을 캐나다 퀘벡주 총독 프레드릭 할디먼드 대령 Col. Frederick Haldimand를 통해 영국에 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또 인디언들은 할디먼드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수백명의 백인 농부들 뿐만 아니라 여성 88명, 소년 193명을 어떻게 살해한 뒤 머릿가죽을 벗겨 말린 다음 색을 칠해 꾸몄는지에 대한 과정을 소상히 설명했다고 전했다. 또 인디언들은 이 서한에서 할디먼드에게 “이 머릿가죽들을 바다건너 위대한 (영국)국왕에게 전하시오. 국왕은 그것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질 것이오. 또한 그의 적들(미국인)을 파괴하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게 되리라”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

가짜뉴스 퍼뜨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서플리먼트 투 더 보스턴 인디펜던트 크로니클을 발행한 사람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잘알려진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이었다. 당시 그는 파리에서 열리고 있었던 영국과의 독립협상에 미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1755년부터 시작된 미국 민병대와 영국군 간의 전쟁은 1782년 미국의 사실상 승리로 끝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양측은 같은 해 파리에서 모여 미국의 독립 조건을 놓고 또다른 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미국 독립운동 진영의 핵심 인물들 중 한 명으로 작가이자 언론인, 사상가, 외교관이었던 프랭클린은 한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바로 여론전, 즉 가짜 뉴스를 이용한 여론몰이였다. 파리에서 발행한 신문에 실린 인디언 원주민들의 미국인 학살사건은 프랭클린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였다. 영국의 잔학함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미국에 대한 동정 및 지지여론을 조성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것이 프랭클린의 전략이었다. 인디언 원주민의 양민학살에 관한 이 ‘가짜 뉴스’가 영국과의 독립협상 과정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없지만, 미국 대표단은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냈다.

 

문제의 기사는 이후에도 인디언 원주민과 영국의 잔학함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여러 신문기사에 인용 보도됐다. 프랭클린은 기사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본질은 진실”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한 친구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언론을 통해 (다른)국가들에게 말할 수 있다”며 “정치인들은 쇠가 달궈져 있을 때 두들길 수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 두들겨 댐으로써 불길을 만들어 낼 수있다”고 쓰기도 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짜뉴스를 퍼뜨려 분위기를 달궈 몰아부칠 수 있다는 것이다. 넬스 키스 Nelson Beecher Keyes의 저서 ‘벤 프랭클린: 애정어린 초상 Ben Franklin: An Affectionate Portrait’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리처드 손더스’등 최소 100여개의 가짜 이름으로 다양한 기사와 칼럼들을 썼으며, 게중에는 팩트와 거리가 먼 조작된 내용들도 있었다.

 

가짜 뉴스를 퍼트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는 프랭클린 말고도 또 있다. 바로 미국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John Adams이다. 그는 1769년에 쓴 한 일기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영국 왕실과 왕당파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가짜뉴스들을 쓰며 저녁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문단들, 기사들, 발생한 일들을 조작하고 정치적 엔진을 작동시켰다 cooking up paragraphs, articles,occurrences and working political engine”고 그는 밝혔다. 한 예로, 영국 국왕이 미국인들을 죽이기 위해 수천명의 병사들을 파병했다는 뉴스는 애덤스가 만들어낸 많은 가짜 뉴스들 중 하나였다. 그랬던 그도 대통령이 돼서는 연방주의를 훼손하는 주장과 뉴스들, 특히 한때 자신이 몰두했던 가짜뉴스들의 유포를 막기 위해 강력한 언론통제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잭슨과 애덤스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이전에도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어김없이 가짜뉴스들이 난무했다.특히 1828년 대통령 선거는 최악의 흑색선전이 난무했던 선거로 평가받고 있다. 후보는 6대 현역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와 독립전쟁의 영웅 앤드류 잭슨 Andrew Jackson. 두 사람은 4년전인 1824년 대선에서도 맞붙은 적이 있었다. 당시 승자는 애덤스. 재대결에서 애덤스는 반드시 재선을 이뤄야 한다는 목표를, 잭슨은 4년전 패배의 수모를 이번에도 당할 수없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선거전이 걷잡을 수없이 과열되는 가운데 애덤스 진영은 잭슨의 어머니에 관한 거짓말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잭슨의 어머니는 영국 군인들이 미 대륙으로 데리고 온 창녀였으며, 후에 흑인과 결혼해 자녀 여러 명을 낳았는데 그 중 한명이 잭슨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사실이 아니었다. 잭슨의 아버지 앤드류 잭슨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허친슨은 아일랜드인이었다. 두 사람은 1765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이미 1761년 결혼해 아들 두 명을 낳은 상태였다. 아버지 앤드류 잭슨은 셋째 아들 잭슨이 1767년 3월 15일에 태어나기 3주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잭슨이 14세가 되던 해에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애덤스 진영은 잭슨이 노예상으로 일했으며, 인디언들을 죽여 시신을 먹은 적이 있다는 가짜소문도 퍼뜨렸다. 잭슨 진영도 이에 맞서서 애덤스가 러시아 주재 공사로 일하던 당시 러시아 황제에게 어린 소녀를 성상납했으며, 대통령 재임 동안 백악관에 개인용 당구대를 들여놓는 등 국민혈세를 남용했다고 주장했다.

 

선거는 잭슨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지 3주후 잭슨의 부인 레이첼이 갑자기 사망했다. 평소에도 심장과 폐가 좋지 않았던 레이첼은 대통령 선거전 기간동안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악화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애덤스 진영 측으로부터 ‘중혼’ 공격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가짜뉴스라기 보다는 사실을 다소 과장한 것이었다고 할 수있다. 레이첼은 불행한 첫 결혼을 끝낸 후 잭슨과 사랑에 빠져 재혼했다. 하지만 첫 남편이 이혼수속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레이첼과 잭슨은 일정기간동안 ‘기술적’으로 중혼상태에 놓이게 된다. 전문가들은 당시 이혼 관련 행정처리가 복잡했던 데다가 통신이 발전하지 못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레이첼과 잭슨이 의도적으로 ‘중혼’을 저지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이다. 어쨌든 레이첼은 대선기간동안 이 문제로 공격을 받자 “워싱턴의 그 궁전(백악관)에 들어가 사느니 신의 집의 문지기가 되겠다”며 워싱턴 정치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었다.

 

아내를 잃은 잭슨은 가짜뉴스로 자신의 가족을 괴롭힌 정적들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아내의 장례식에서 그는 눈물을 겨우 삼키면서 “ 나의 모든 적들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그녀에 대해 거짓말을 한 악마같은 비열한 놈들은 신의 자비를 바래야 한다”라고 말했다.며칠 뒤 친지들에게는 “그녀(레이첼)가 자신을 죽인 살인자들을 용서하리라는 것을 알 고 있으며 전지전능하신 신도 그리하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없다”고 털어놓았다. 아내없이 홀로 백악관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는 “가슴이 찢어진다. 힘을 내려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전지전능하신 신과 레이첼은 (가짜뉴스를 퍼트린)살인자들을 용서하겠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할 수없다”고 토로했다.

 

로마 역사를 바꾼 가짜 뉴스 캠페인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이듬해에는 콜린스 사전이 ‘가짜 뉴스(fake news)’를 올해의 단어로 꼽았다. 2017년 부동산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가 45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것을 계기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짜 뉴스의 심각성이 크게 대두됐다. 가짜 뉴스는 갈등을 악화시키고 불안정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기반까지도 뒤흔들고 있다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하지만 앞의 예들에서 보듯, 가짜 뉴스는 인터넷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트럼프와 인터넷이 등장하기 수백년, 아니 수천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미국 남캘리포니아주립대 역사학과의 제이컵 솔 교수는 2016년 폴리티코매거진에 기고한 ‘가짜뉴스의 길고 잔혹한 역사 The Long and Brutal History of Fake News’란 제목의 칼럼에서 “가짜 뉴스는 진짜 뉴스 보다도 훨씬 더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 있어왔다”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439년 인쇄기술을 발명한 이후 뉴스 공급이 본격화되면서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게 된 것으로 지적했다.

 

2000여년전 로마의 역사를 바꾸는 사건의 과정에도 가짜뉴스와 음모가 난무했다. BC 44년 로마의 최고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가 피살됐다. 그에게는 누이의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우스 Gaius Octavianus(또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그리고 심복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가 있었지만 둘 중 누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표명한 적이 없었다. 이중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의해 그의 양자로 사후 입적된다. 누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를 놓고 로마 제국은 내전의 혼란 속으로 휘말려들어갔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수년간 내전 세력 정벌은 물론 옥타비아누스와 치열한 신경전으로 벌여오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여왕 클레오파트라 Cleopatra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기원전 36년, 그는 임신한 아내 로마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옥타비아는 남편의 공식 부임지인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저택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고 있었다. 옥타비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즉 안토니우스와 옥타비누스는 처남 매부 사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이 결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동양의 정부’에 빠져 합법적인 로마인 부인을 내친 안토니우스는 진정한 로마인이 아니라는 말을 퍼뜨리고 나선 것이다. 로마의 전통과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에 빠져 장군으로서 자신의 업무를 등한시하고 있으며, 늘 술 독에 빠져 지내고 있다는 말도 퍼트렸다. 동전에 안토니우스를 조롱하는 짧은 글귀를 새겨 넣어 유통시키는 작전도 벌였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를 통해 가짜뉴스를 전파하는 방식과 유사했던 셈이다. 옥타비누스는 권력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듯 스스로 집정관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도 표명했다. 다만, 한가지 단서를 달았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에서 물러나면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안토니우스는 기소되어 몇 차례 로마로 소환당했으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

 

BC 35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아르메니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진 성대한 개선식에서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집트의 '왕들 중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여겨지는 카이사리온 Caesarion을 이집트의 '왕들 중의 왕'. 그리고 그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에게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의 왕', '시리아와 리비아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간의 상호 비방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찬탈했다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불법으로 속주를 차지하고 로마의 영토를 자기 자식들에게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다

안토니우스의 유서를 원로원에서 공개하는 옥타비아누스를 묘사한 영상의 한 장면 

 

유럽 중세 때 자행된 유대인 학살을 묘사한 그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가 이혼한 BC 33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작성한 유서를 입수했다며 상원에서 그 내용을 공개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유서는 안토니우스에게 등을 돌린 측근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긴 것이었다고 한다. 유서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했다. 또 자신이 죽으면 로마가 아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옆에 묻어달라고 밝혔다. 이같은 내용에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가 로마와의 사실상 단절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옥타비아누스의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로마인들이 그에게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 유서가 진짜 안토니우스가 쓴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간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유서의 일부가 옥타비아누스 측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BC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기원전 30년 8월 로마군이 이집트에 상륙하자, 안토니우스는 패배의 절망 속에서 자살했다. 탁월한 정치감각, 특히 여론전에 능했던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로마 초대 황제 자리를 차지했고, 40년 넘게 권력을 휘둘렀다.

 

마녀사냥 등 온갖 미신과 유대인 혐오증 등이 난무했던 유럽의 중세시대에도 수많은 가짜뉴스들이 민중의 마음과 일상을 뒤흔들었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1475년 부활절날 이탈리아 트렌트에서 벌어진 어린이 실종사건이다. 두살반짜리 시모니노 Simonino가 감쪽같이 사라지자 마을이 발칵뒤집혔다. 베르나르디노 다 펠트레 Bernardino da Feltre 신부는 설교에서 유대인들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아 아이를 납치해 죽인 다음 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유월절에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는 유대교의 전통을 어린이 실종사건과 연결시켜,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혐오를 부추기고 나선 것이다. 아이의 시신이 한 유대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됐다는 근거없는 말도 했다. 신부의 주장이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트렌트는 공포에 빠졌다. 급기야 요하네스 힌더바흐 Johannes Hinderbach 주교는 트렌트 내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체포해 범죄를 규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수많은 유대인들이 잡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그중 15명은 견디다 못해 죄를 인정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트렌트 이외 도시에서도 비슷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됐다. 아동실종사건과 유대인 간의 연관성에 회의적이었던 당시 교황청은 힌더바흐 주교를 저지하고자 했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유대인들의 기독교인 살해를 더욱 주장했으며, 심지어 시모니노가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며 ‘성자 시몬’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12세기 이후 유럽에 퍼져있던 유대인의 기독교 아동 살해 및 피 마시기에 관한 가짜뉴스들이 오늘날까지 반유대주의의 근간이 됐다고 보고 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 역시 중세시대 유대인 혐오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트렌트의 살바도리광장에 있는 한 조각상. 시모니오가 순교 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898년 2월 16일자 뉴욕저널 1면 
1898년 2월 17일자 뉴욕월드 1면 톱기사와 삽화 

가짜뉴스가 일으킨 진짜 전쟁  

 

기성언론사가 신문 판매를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해 퍼트리고, 전쟁까지 일어나게 만든 사례도 있다. 바로 ‘옐로 저널리즘(황색 언론)’이란 단어를 탄생시킨 19세기말~20세기 초 미국 신문사 뉴욕월드 New York World와 뉴욕저널아메리칸 New York Journal American(이하 뉴욕 저널)이 벌인 이른바 ‘신문 전쟁’이다.

 

조지프 퓰리처 Joseph Pulitzer의 뉴욕월드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William Randolf Hearst의 뉴욕저널은 치열한 라이벌 관계였다. 두 신문이 센셔이너널한 사건사고 기사들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중, 1895년 스페인 식민지 쿠바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미국 내에서는 쿠바 동정론과 독립론이 급부상했고, 뉴욕월드와 뉴욕저널은 쿠바에 기자들을 보내 스페인의 만행을 주장하는 자극적인 기사들을 연일 쏟아냈다.하지만 이런 기사들은 대부분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전쟁 이미지를 포착하라는 허스트의 명령을 받고 쿠바에 도착한 삽화가 프레드릭 레밍턴 Frederic Remington이 “긴장이 완화돼 전쟁 같은 건 없다”고 전보를 보내자, 허스트가 “당신은 그림들을 공급하시오, 전쟁은 내가 공급하겠오 You furnish the pictures and I’ll furnish the war”라고 답신을 보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898년 1월 쿠바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 정부는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메인 Main 호를 아바나에 급파했다.. 쿠바 독립군과 스페인군 간에 전투가 계속되던 1898년 2월 15일 오후 9시 40분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 호가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하는 사건해 미 해군 26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허스트의 뉴욕저널은 “적의 비밀 병기에 전함 메인호 두 동강이 나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스페인 해군이 메인 호 밑바닥에 몰래 기뢰를 설치한 다음 쿠바 해변에서 원격 조정으로 터트렸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기뢰의 설계도면을 지면에 게재해 기사 내용을 더욱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뉴욕저널은 메인 호 사건과 관련한 정보는 제공하는 사람에게 5만달러를 주겠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뉴욕월드 역시 비슷한 기사들로 지면을 채웠다.

 

당시에도 일각에서는 두 신문의 과도한 몰아가기식 보도에 대한 우려론이 제기됐다. 하지만 미국 여론이 쿠바사태 개입 및 스페인 응징론으로 기울어 지면서, 1898년 4월 의회는 스페인에 결국 선전포고를 내린다. 미국은 쿠바와 필리핀에서 승리를 거뒀다. 같은 해 12월 10일,미국은 파리 조약에 따라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 리코, 괌의 지배권을 빼앗아왔다. 이를 통해 미국은 글로벌 파워국가로 결정적으로 일어서게 된다. 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1971년, 메인호 폭발사건에 대한 재조사 결과 배 안의 보일러실에서 일어난 사고로 폭발한 것이란 잠정 결론이 내려졌다. 1976년 해군 조사는 메인 호의 석탄저장고에서 자연 발화해 폭발과 침몰로 이어졌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