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와 화순 운주사를 다시 찾아가고픈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만 있다가, 2022년 4월 봄날에 드디어 실행에 옮기게 됐습니다. 이 두 곳은 제 기억 속에서 유난히 감동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언제 이 곳을 찾았었는지 정확한 연도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엄사 각황전의 그 고색창연하고 웅장한 아름다움과 운주사의 말로는 표현할 수없는 특별한 기운을 느꼈던 순간만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가파른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서 위를 올려다 봤을 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각황전의 자태 !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운주사 대웅전 뒤편의 산길을 올라다가 문득 뒤돌아 보니, 마치 비를 피하려는 듯 커다란 바위 밑에 오종종 서있던 석불들의 모습! 이 두 장면은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 제 머리 속에 사진처럼 남아있습니다. 그 때와는 계절도 다르고 날씨도 다르지만, 오랫만에 다시 찾은 화엄사와 운주사는 여전히 아름답더군요.
사실, 남도는 제겐 아릿한 아픔입니다. 오래 전 역사학도였던터라 역사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1980년대 그 혹독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남도 땅과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리산하면 빨치산이, 광주하면 1980년 5,18 민주항쟁이, 여수와 순천하면 해방정국 시절인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함평하면 조선말기인 19세기 중엽 농민봉기가 생각나는 식이지요. 남도의 너른 농토를 바라보면서, 지주들이 도대체 얼마나 수탈했으면 농민들이 못살겠다면서 들고 일어났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남도에 대한 역사적 부채의식일까요? 먹물의 허위의식이라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
아픈 역사를 가진 남도 땅에서 맞은 새 봄은 참 예뻤습니다. 여행의 기억을 남기고 싶어 사진첩을 만들어봅니다.
화엄사는 544년에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엄경》(華嚴經)의 두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요..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이 증축해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7층탑·석등롱(石燈籠) 등을 건조했고, 신라 문무왕대인 677년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각황전(覺皇殿, 당시 이름은 장육전)을 지어 《화엄경》을 보관했다고 합니다. 소설 <태백산맥>에도 등장하지요. 한 승려가 화엄사에 잠시 머무르다가 길을 나서면서, 군인들에게 쫓겨 지리산 화엄사로 들어온 좌익 반란민들을 걱정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화엄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느낄 수있는게 독특한 가람배치입니다. 구체적인 의도는 잘 몰라도, 입체적이며 역동적임을 알 수있지요. 대웅전보다 두배는 더 큰 각황전도 특이한데, 이질적이기 보다는 서로 잘 어우러지는 느낌입니다.
제가 찍은 각황전 사진이 너무 엉망인지라, 자료사진을 올립니다. (2015년 가을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국보 제67호로 지정된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고 합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3층, 7칸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나 불상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각황전은 소실된 후 30여년 만인 인조 때 재건한 것입니다. 재건 과정이 모두 마무리되자 숙종이 직접 쓴 ‘각황보전(覺皇寶殿)’이라는 편액을 내려 이때부터 각황보전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각황전'이란 '깨달은 왕(부처)이 머무는 곳'이란 뜻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왕(숙종)을 깨우치게 한 곳'이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각황전 아래쪽 왼편에 있는 탑은 보물 132호인 동 오층석탑입니다. 9세기말~10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웅전 석단 하단의 마당에 있는 서 오층석탑(보물 제 133호)과 나란히 서있지만, 서로 다른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각황전과 함께 매우 인상적인 이 석등은 높이가 6.4m나 됩니다. 무려 국보 12호이니, 그 역사적 예술적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있습니다. 참고로 1호는 숭례문,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현재 국박에 있습니다), 3호 진흥왕 순수비, 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6호 충주 탑평리 7층석탑, 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9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이중 실물을 영접한 국보는 5개뿐이네요 ㅠㅠ). 각황전 앞 석등은 8각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구 모양의 기둥을 세운 다음 화려한 장식을 올려놓았습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자 4마리가 돌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 '사자탑'은 보물 300호로, 각황전 보다는 원통전 앞에 있다고 해야하는 석탑입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말 ~10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황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사사자 3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조형미는 훨씬 떨어집니다. 사사자 3층석탑은 국보35호로 , 불국사 다보탑과 비견될 정도로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합니다.
이제 화순 운주사로 가봅니다.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을 향하여 들어가는 길입니다. 연두빛 나뭇잎들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처음 운주사를 찾았을 때, 입구에서부터 느낌이 참 남달랐습니다. 우선, 유명 사찰을 찾을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던 어수선한 밥집들이나 조악한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 산나물이며 버섯 파는 사람들 따위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화엄사만해도 일주문과 좀 떨어져 있기는 해도 입구에 큰 식당가가 조성돼있잖아요. 운주사의 심상치않은 기운은 정갈한 이 길에서부터 느껴집니다.
운주사는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전설을 가진 절입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수많은 절들 중 스토리텔링 면에서 보자면 운주사 만한 곳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불상 천 개와 탑 천 개를 세웠다는 설이 전해져내려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異座”란 기록이 있어 천불천탑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정교하지 않은 것으로 볼때 세련된 석공이 아니라 민초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고, 미륵 신앙에 대해서도 무지와 다름없지만, 봉건 신분사회에 얽매인 민초들이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미륵불을 기다렸을 간절한 마음이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에서 느껴집니다. 천불천탑이 사실인지는 알 수없으나, 운주사 내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석탑은 20여기, 석불은 90여점이라고 합니다. 시기는 고려 때인 12세기로, 전설처럼 하루는 아니고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지고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운주사는 황석영의 <장길산>에도 나옵니다. 난을 일으켰다가 관군에게 패해 달아나던 민초들이 능주 땅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오며 노비와 천민이 양반 대신 나라의 중심이 되는 개벽천지 새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게 되고, 그들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의 천민들이 몰려들어 천불천탑을 세우는 장면이지요.
그들이 세운 절의 이름은 ‘운주사(運舟寺)’로, 한 노인은 “배를 부린다는 뜻이란다. 새로운 우리 세상이 바로 배가 되는 게야. 미륵님 세상이 배가 된다. 우리 중생이 물이 되어 고이면 배가 떠서 나아가게 되는 게야”라고 설명하지요.
운주사에는 다른 사찰에선 볼 수없는 특이한 석탑과 석불이 많습니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만난 이 석탑의 이름은 쌍교차문칠층석탑입니다. 엑스(x) 표시가 새겨진 불탑이라니... 불교의 '만'자를 변형한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흔히 장난처럼 긋는 선 표시일까요. 옆 면에는 마름모꼴 표시도 있습니다. 뭔가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것일까요? 운주사의 석탑 중에서는 조형미를 갖추고 있는 수준급 작품으로, 고려시대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대웅전으로 가는 길 옆 바위 앞에 세워진 석불들.
석조불감입니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데,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밖에 만든 감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 앞뒤를 통하게 했고,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습니다. 특이하게도 감실 안에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입니다. 그리 정교한 불상은 아니지만, 독특한 형식이란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석탑이 운주사에는 또 있습니다. 동그란 방석이라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동그란 시루떡들을 쌓아놓은 모양이라고 할까요. 이름은 모양 그대로 심플한 '원형 다층석탑' . 투박하고 정겹습니다.
와불을 향해 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석불들.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산을 오르다가 쉬고 있는 것인지...아님, 햇살을 잠시 피해 있는 걸까요?
운주사 와불 전설은 사실 너무 유명하지요.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고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이 난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이 울었다고 해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져내려옵니다.
와불을 위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두개로 나뉘어져 있는 바위의 모양 그대로를 이용해 새긴 것을 알 수있습니다. 두개의 와불이 정말로 일어서는 날이 올까요?
마지막으로 화순 적벽과 너릿재 옛길 사진을 올립니다.
적벽 관광코스는 반드시 사전 허가를 받고 단체로만 할 수있는데 코로나로 아직도 중단중이어서, 그나마 좀 볼 수있는 창랑적벽을 잠시 바라봤습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여기도 다녀가셨네요. 이 분은 방방곡곡 아니 다닌 곳이 없으신듯 합니다. "무등산이 높다하되 소나무 가지 아래있고, 적벽이 깊다더니 모래 위를 흐르는 구나"라고 노래하셨답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의 현장에 있는 적벽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멋진 풍광인 것만은 틀림없네요. 한 여름 강물이 가득 흐르는 모습이었으면 더 멋졌겠다 싶습니다.
아래는 화순과 광주를 잇는 옛길인 '너릿재 옛길'입니다. 신록이 정말로 싱그러운 길입니다. 집 가까이에 있다면, 매일 가고픈 길이네요. 자동차가 전혀 지나가지 않는 길이라서, 강아지와 산책에는 정말 더없이 좋습니다. (진드기는 조심^^)
이곳은 사실 광주 항쟁의 기억 때문에 와보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화순을 와보고서, 광주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를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광주가 군에 점령됐을 당시에 바깥세상과 겨우 연결될 수있게 해준 곳이 바로 이 옛길이었다고 합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광주로 들어가기 위해 산길을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
남도 땅 곳곳이 그렇듯 너릿재도 역사적 아픔이 참 많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내려오면서 여기에서 처형당해 시신이 널부러져있었다고 해서 '널재'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1946년 8월 화순탄광의 광부들이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이 고개를 넘다가 미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아 10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비극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떠난 화순 탄광을 미군정이 접수하고 일체의 노동쟁의를 불법으로 금지한데 이어 우파인사를 소장으로 앉히면서 불만이 극심해진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던 중 벌어졌습니다. 미군과 경찰의 장갑차와 자동차에 토끼몰이 당하듯 밀려 너릿재 정상에 다다른 탄광노동자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1950년 7월에는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된 사람들이 너릿재 인근에서 학살 당했고, 같은해 9월 광주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이 끌려나와 너릿재를 넘어 화순읍 교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1519년 기묘사화로 능주 유배길에 오른 정암 조광조도 너릿재를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너릿재 전망대에서 바라본 화순 시내의 모습입니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 끝에 터널이 있고, 터널을 지나면 바로 광주입니다. 한가로운 풍경이지만, 이 길에서 벌어졌던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무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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