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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따라가는 여행-윤선도의 보길도

bluefox61 2022. 5. 4. 10:17

보길도로 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멀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화순-구례-고흥-벌교-보성-완도를 거쳐 마지막이 보길도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길도는 심리적으로 아주 먼 곳에 있는 작은 섬의 느낌이 더 강했던 듯합니다. 그 곳에 가면 아름다운 해변과 윤선도의 원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쉽게 갈 수는 없는 곳,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곳으로 상상하게 되는 섬이 바로 보길도인 듯합니다. 오래 전부터 전해들었지만 보길도를 이제사 찾은 이유입니다. 

 

보길도는 누가 뭐라해도 '윤선도의 섬'이지요.  학교에서 윤선도를 어떻게 배웠던가...떠올려봅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국어시간에 배운 '어부사시사'이지요. 요즘도 학교에서 '어부사시사'를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선비들이 한자로 시조를 지을 때, 이 분은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우리 말로 시조를 지었다는 사실을 국어선생님께서 엄청 강조하셨던 것같습니다. '어기여차'같은 후렴구도 강조하셨고요.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에서 '어부사시사'를 찾아보니, 보길도의 봄 풍경을 노래한 4번째 시조는 이렇군요.

 

우난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이어라 이어라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뉫 속의 나락 들락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至匊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於思臥)  (* 배를 저을 때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한자로 의성화한 후렴구)

말가한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나다

(맑은 깊은 못에 온갖 고기 뛰논다)

 

학생 때 이걸 분명히 배우긴 배웠을텐데 왜 이리 생전 처음 읽는 느낌일까요. 그래도 '어부사시사'의 문학적 의미는 잊지 않았으니 , 수업 시간에 배운게 있기는 하다고 위안 삼아봅니다. 

 

아래 사진은 세연정의 모습입니다.

윤선도에 대해 또 한가지 생각나는 것은, 이 분이 엄청나게 상소를 많이 올리셨다는 사실입니다.할말은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품이셔서 많은 상소를 올려 논쟁에 휘말렸고 그래서 귀양도 많이 하셨다고 하지요.  윤선도가 살았던 시대를 돌아보면, 비판적 지식인으로선 당연한 일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선조 때인 1587년에 태어나 5살부터 11살까지 임진왜란으로 피란생활을 했고, 광해군 때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20대 중반에 세도정치가들을 비판하고 영창대군을 처형한 왕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 당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기나긴 유배 이력을 시작하게 되지요.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정세가 바뀌면서 여러차례 관직 제의를 받지만 물리치거나 , 잠시 취임했다가 사퇴하는 식으로 타고난 반골기질을 과시하시다가, 인조의 둘째 왕자인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됐지만 몇년 뒤에 또 그만두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가 버립니다. 이후에도 관직에 나갔다가 사퇴하기를 반복하다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평생 은둔을 결심하고 제주도로 가려다가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이 곳에서 살게 됐습니다 . 효종이 즉위하면서 몇차례 관직에 나가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논란에 휘말려 그만 두곤하다가, 효종이 사망한 후에는 상복을 몇년 입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그 유명한 예송논쟁에 휘말렸다가 함경도와 전라도 광양에서 위배생활을 했고, 81세 때인 1667년에 석방돼 보길도로 돌아와 85세 때에 보길도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진짜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파란만장할 수가 있나 싶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인조반정,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전란도 참으로 많이 겪으셨네요. 

 

보길도에 가려면 완도 화승포항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 동천항에 내려,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 보길도로 이동하면 됩니다. 상당히 큰 섬이기 때문에 걸어서 다 둘러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꽤 높은 산도 여럿입니다. 

 

자연을 이용하되 인공적인 장치들을 가미해 아름답게 조성한 정원을 원림이라고 하지요. 세연정은 지금은 담에 둘러싸여 있지만  예전에는 자연 속에 있었을 텐데, 그 모습이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세연정은 두 곳의 인공 연못 사이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정자입니다. 특이한 것은 가운데 한 칸은 온돌방이란 점입니다. 문 들어 올리면 넓은 대청마루가 되고, 내리면 전체가 방이 되는 구조이지요. 세연정은 물에 깨끗이 씻은 듯 단정해 기분이 좋아지는 정자란 뜻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세연정은 1992년에 복원한 것이어서 문화재는 아닙니다. 현판의 글씨는 누가 쓴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나와있지 않네요. 윤선도가 쓴 것을 복원할 걸까요? 

 

기록에 따르면, 윤선도는 못을 파고 큰 암석을 옮겨 정원을 만들고 여러채의 집을 짓는데 많은 돈과 인력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친지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네요. 윤선도 본가가 호남의 대부호였다고 합니다. 

 

세연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면, 윤선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생활했던 낙서재, 곡수당 등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만날 수있습니다. 낙서재란 학문이나 글을 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樂書) 집이란 뜻입니다. 만약 제가 서재나 집을 짓게 되면 '낙서재'로 할까...꿈을 꿔봅니다. 낙서재 내에는 조상의 위폐를 모신 무민당, 동서쪽의 휴식공간인 동와, 서와, 병풍처럼 아름다운 바위라는 소은병이 있습니다.  

낙서재

윤선도의 아들이 거처하던 집인데, 저 돌다리를 건너 하루 세번씩 윗쪽 낙서재에 사는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러 갔다...고 앞의 안내판에 써있네요. 아래 사진은 인공연못 쪽에서 바라본 곡수당의 측면 모습입니다.

곡수당

아래 사진은 낙서재, 곡수당 등이 자리잡은 곳의 바로 맞은 편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입니다.  꽤 높은 자리에 있어서, 그 옛날에 어떻게 여기에다 집을 지을 생각했을까 싶습니다. 크기는 몸 하나 겨우 누일 정도입니다. 

동천석실

낙서재 쪽에서 바라본 동천석실의 모습입니다. 

윤선도가 동천석실에 올라가다가 나오는 큰 바위에 앉아 차를 마시기 위해 홈을 파놓았다고 하는데, 바로 여긴가 아닌가 싶네요. 

동천석실 바로 앞에 있는 용두암의 설명문을 들여다보니 재미있는 내용이더라구요. 너무 가파라서 음식을 가지고 오기 힘들어, 도르레 같은 장치로 아래쪽에서 끌어올렸다는 겁니다.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과 비슷한 발상인거죠.  좀더 높은데 올라가서 멋진 풍경을 보겠다는 윤선도의 굳은 의지, 차와 음식을 즐기고자 하는 본능, 그리고 유난스런 주인을 모시느라 고생했을 시종들이 쉽게 상상됩니다.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 관련 가옥들은 최근에 복원된 것들이어서 좀 아쉽습니다. 복원되기 이전엔 어땠는지, 어떻게 복원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있었으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