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여행

'슬픔과 매력'의 땅 발칸반도를 가다-세르비아 베오그라드⓹

bluefox61 2024. 2. 9. 11:33

저와 제 여행파트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여행을 마친 후 옆나라 세르비아로 넘어갔습니다. 

미니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으면서 보았던 산악풍경과 자그마한 관광지(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 만들었다는 마을 등등) 이야기는 패스하겠습니다^^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번화하고 서구적인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의 풍경. 19세기 중반 세르비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몰아낸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국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르비아의 수도는 베오그라드입니다. 사실 이 도시에 대한 사전 정보는 거의 없었어요. 제가 아는 것은 발칸 반도에서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가장 막강한 맹주 국가이고, 옛 유고 연방은 물론이고 소비에트 체제 해체 후 신 유고연방의 핵심이자 수도였던 국가, 그리고 대세르비아주의의 중심국이자 참혹했던 유고 내전의 가장 큰 원인과 책임이 있는 국가라는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세르비아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고 가면....

 

세르비아가 위치한 발칸반도는 5세기 경에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이 지배했고, 6세기경에는 슬라브족이 가톨릭의 신성로마제국과 그리스 정교의 비잔틴 제국으로 나뉜 반도로 이주해 정착했다고 합니다.   14세기까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작은 공국들이 만들어졌는데 많은 외세침략에 시달리다가 1389년 그  유명한 '코소보 전투'에서 패하면서 결국 반도의 약 절반(세르비나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이 오스만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나머지 지역은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하게 되고요.

 

14세기부터 약 400년간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에서 이슬람 개종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개종한 사람들은 상류층을 형성한 반면 개종을 거부한 사람들은 하급 계층이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슬라브족 간에도 이슬람교로 개봉한 사람과 정교를 고수한 사람들 간에 종교적 갈등이 치열했고,  정교를 믿는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과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켜 맞서 싸웠습니다. 

세르비아가 독립국이 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에서 패하면서 러시아 동맹국으로 참전했던 세르비아는 물론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하게 된 겁니다. 반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병합됐고요.

 

시내 중심가 공화국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국왕의 동상. 1882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국왕의 손가락이 칼레그메그단 요새 쪽 즉 베오그라드의 역사가 탄생된 지역을 가르키고 있다고 하네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를 완전히 독립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국왕은 1868년 공원 산책 중 암살당했습니다.

 

1918년 마침내 1차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때 많은 신생국가들이 생겨나는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베오그라드는 왕국의 수도가 됩니다. 훗날 국명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뀌었는데,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 등 간에 갈등이 치열했다고 해요. 이 와중에 국왕이 암살당하는 사건도 벌어졌지요. 특히 크로아티아 내부에는 반세르비아 파시스트 조직 '우스타샤(또는 우스타셰)'가 활동했는데, 2차세계대전 발발해  독일 등 주축국 6개국이 발칸반도를 점령했을 당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이 유대인과 집시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인 등 무려 60만명을 학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히틀러 조차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정권에게 "좀 적당히 해라"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고 하지요.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발칸엔 공산주의자 요시프 티토가 세운 '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이 탄생합니다. 티토는 크로아티아 출신이었지만 종교, 민족을 벗어난 철저한 공산주의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하면서 6개 공화국 자치정부의 권리를 인정하는 한편으로 강력한 통합 통치를 행합니다. 하지만 1980년 티토 사망 후 다민족 다종교 국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게 되지요. 

 

유고 왕국과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이자, 소비에트 체제 붕괴 후 신 유고 연방 수도였다가 세르비아 수도가 된 베오그라드는 '  하얀 도시'란 뜻입니다. 로마인이 건설한 요새 성벽의 하얀 돌 색깔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바강과 도나우 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자리잡고 있어서, 한 눈에 봐도 딱 지리적 요지임이 느껴집니다. 

 

강변의 구릉지대에 칼레그메그단 요새가 자리잡고 있지요.  지금은 몇몇 흔적만 남은 요새의 성벽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두 강이 합쳐지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2000년이 넘는 이 요새의 역사는 기원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로마시대 때인 6세기에 요새의 모습이 제대로 갖춰지게 됐다고 합니다. 19세기 말쯤 요새 전체가 공원으로 조성돼 지금은 시민들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요새에서 내려다 보이는 사바강과 도나우 강이 합쳐지는 모습

 

요새로 들어가는 입구

 

칼레그메그단 요새에 남아있는 로마시대의 우물 유적 

 

 

베오그라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연도 중 하나는 아마도 1521년일겁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1453년)시켜 동로마제국의 역사를 끝장냈던 오스만 제국의 정복왕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증손자 술탄 쉴레이만 1세에 의해 함락된 해이기 때문입니다.쉴레이만 1세는 46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세 대륙을 가로지르며 13차례의 대외원정을 실행에 옮겨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인물로 꼽힙니다. '위대한 쉴레이만 Suleiman the Magnificiant)'란 별명으로 불리는 그는 즉위 1년도 채 안돼 증조 할아버지 메흐메트2세에 이어 서유럽 정복에 나섰고, 전초전으로 1521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베오그라드를 공략했습니다. 당시 베오그라드를 장악한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서유럽 진출에 최대 걸림돌이었다고 해요. 결국 베오그라드는 한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오스만 제국 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이후 1526년 헝가리 왕국을 멸망시킨 후 1529년과 1532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까지 공격해 평화협정을 맺기까지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기리는 <승리자의 탑(스포메니크 포베드니카)>.

 

 

베오그라드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인상은,  

 

1. 긴 역사를 지닌 곳임에도 불구하고 칼레그메그단 요새를 제외하고  유서깊은 유적지나 건축물이 많지 않다 

2. 헝가리와 오스만의 오랜 지배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처럼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유산을 찾아 보기 힘들고 세르비아와 정교 유산 일색이다. 

3. 발칸 반도의 중심국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과의 교통연결이 불편하다 . 

4. 미국 등 세계 각국의 프랜차이즈와 명품 브랜드 숍들이 즐비하지만, 1990년대 유고 내전과 코소보 내전 때 나토 군으로부터 공습을 받은 과거 때문에 여전히 반나토, 친러시아, 친 푸틴 성향이 강하다 . 문자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주로 쓰는 라틴 문자 대신 키릴 문자를 쓴다 . (미국 등 서방의 러시아 제재 일환으로 세르비아의 정치인, 경제인들 중 상당수가 제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5. 현대 세르비아의 최고 영웅은 니콜라 테슬라로, 화폐에도 테슬라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의 이름도 테슬라 국제공항이다. (니콜라 테슬라가 세르비아 계인 것은 맞지만, 출생지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스밀랸이고 20대때 미국으로 이주해 1943년 사망할때까지 미국에서 생활하고 활동했습니다. 물론 그 자신은 세르비아 민족으로서 자긍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등이었습니다. 

 

사실, 베오그라드에서는 오래된 건축 유산을 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18~19세기 때 세워진 건물들이지요.  

베오그라드는 기나긴 역사를 거쳐오면서 40번 넘게 파괴와 재건을 거쳤다고 합니다. 

현재의 베오그라드에서 오스만 제국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19세기 중반 미하일로 오브라노비치 3세가 강력한 반 오스만 정책을 취하면서 기존의 오래된 건축물을 허물고 서유럽식으로 베오그라드를 재건축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고색창연해 보이는 성마르카 정교 성당은 1940년대에 완공됐고, 

 

 

 

심지어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성사바 정교 대성당은 1935년부터 공사가 시작돼 여러차례 중단됐다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2004년에 완공됐고, 내외부의 장식이 모두 완성되기는 2020년입니다. 내부에 들어가면  모든게 새 것으로 반짝반짝합니다. 입구 안내판을 보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에 이곳을 찾아와 완공을 축하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하네요.  

 

 

금장식과 오색의 성화들, 대리석으로 모든 것이 번쩍번쩍 화려화려합니다. 중앙 돔은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모스크보다 크다고 자랑해놓았더군요. 

 

하지만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오히려 이런 기념상이었습니다. 

 

 

공원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된 이 기념상은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서방의 나토군이 베오그라드를 공습했을 때 사망한 어린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상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였을 뿐이다"라고 적혀있네요. 시내에는 당시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있기도 합니다. 

 

베오그라드 어린이들의 죽음...안타까운 죽음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세르비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을 사주하고 지원해 죽게 만든 그 수많은 어린이들도 "어린이였을 뿐"이었습니다. 

세르비아 내의 이슬람 자치지역인 코소보에서 일어난 분리독립 움직임을 탄압하며 학살했던 수 많은 주민들 중에는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코소보의 어린이들도 "어린이였을 뿐"이었습니다. 

 

옛 유고슬라비아연방 시절 세르비아 내 자치주였던 코소보는 주민의 92%가 알바니아계입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민족의 발원지’이자 국가와 종교의 심장으로 간주한다고 해요. 세르비아의 많은 중세 정교회 수도원이 코소보에 있고,  오스만 제국에 항쟁한 1389년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1990년대 초 유고연방이 해체된 뒤 세르비아 정부는 1998~1999년 분리독립을 시도하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분리주의 세력을 잔인하게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인종학살이 발생해 1만3천여명이 숨졌습니다. 

 

아무튼, 베오그라드 여행은 예상했던 대로 씁쓸함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나마 좋았던 것은 세르비아산 와인이었습니다. 

맛있고 저렴한 세르비아 산 와인을 매일 밤 호텔 방에서 부어라 마셔라 했다는...

 

술이 취해서인지 카메라 초점이 엉망이네요 ㅎㅎㅎ. 왼쪽은 세르비아, 오른쪽은 몬테네그로 와인입니다.

 

참고로, 세르비아와 코소보 정정은 지금도 불안합니다. 2024년 2월 현재 세르비아에서는 대통령 선거 부정을 성토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고,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던 코소보에서는 북부에 주로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코소보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자치를 요구하고 나서 불안이 고조되고 있지요. 최근엔 코소보 정부가 세르비아 디나르 화폐 대신 유로화를 쓰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파문이 일고 있고요. 코소보 불안이 다시 악화될까봐 서유럽 국가들 조차 말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7월 영국 BBC가 '세르비아:여전히 열혈 푸틴 지지자가 존재하는 나라'란 기사를 낸 적이 있어서 붙여봅니다.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nk2q1x54jdo

 

세르비아: 여전히 ‘열혈 푸틴 지지자’가 존재하는 나라 - BBC News 코리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 세계는 어느 쪽이든 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중에서도 세르비아에선 여전히 열렬히 푸틴과 바그너 그룹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www.b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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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발칸반도 두개 나라 여행을 마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넘어갑니다. 

직통 기차 편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국경을 넘어가는 과정이 험난했습니다. 

비유럽연합 국가에서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이렇게 길고 어려울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국경에서만 몇시간을 대기만 했지요.

 

세르비아쪽 국경은 호르고스(Horgoš) , 헝가리 쪽 국경은 뢰스케(Röszke)입니다. 통과하는데 4~5시간은 기본이고, 10시간 걸릴 때도 있다고 합니다. 여행 후 기사를 찾아보니 헝가리 정부가 국경 대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던데, 반년 정도 지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기다리다 지쳐 아예 버스에서 내려서 나뭇 그늘 아래 서있는 승객들 

드뎌 헝가리 뢰스케 쪽으로 넘어갑니다. 유럽연합 국기 표시가 보이네요. 

유럽연합의 프리미엄을 실감하게 됩니다. 

 

세르비아-헝가리 국경은 2015년경 중동 및 북아프리카 난민 사태가 발발했을 때 수 많은 불법 난민들이 몰려 들었던 곳이지요. 당시 헝가리가 강력한 국경통제를 취해서 외신을 통해 많이 보도가 됐던 곳이기도 합니다. 헝가리 오르반 행정부는 난민 유입 차단을 위해서 헝가리-세르비아 인접 지대 국경을 폐쇄하고 난민 수용 반대 국민투표를 치르는 등 난민 문제 처리에 있어서 시종일관 매우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어쨋든 오랜 기다림 끝에 국경을 통과하는데,  목숨을 걸고 좀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땅을 찾아  세르비아-헝가리 국경까지 왔던 수많은 난민들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