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대다수는 홀로코스트가 아닐까요? 영화 '피아니스트'에 등장했던 바르샤바의 게토 풍경, 아우슈비츠(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의 이미지들이 연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밖에 폴란드가 오랜 역사에 걸쳐 주변의 여러나라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는 것 등도 생각납니다.
그러고 보니 폴란드는 유난히 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된 국가인듯합니다.
물론 제가 격하게 사랑하는 쇼팽의 나라, 퀴리 부인(폴란드 이름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의 나라이고, 그리고 영화 강국이기도 하죠. 제가 좋아하는 폴란드 영화감독을 꼽아보자면 안제이 바이다, 로만 폴란스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안드레이 줄랍스키,아그니에슈카 홀란드 등등 너무 많습니다. 요즘은 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가 참 좋더라고요. 2013년 영화 '이다'로 아카데미 상을 받았고, 냉전 해체 전후 젊은 연인들의 방황을 그린 <콜드 워>로도 여러 상을 수상했죠.
참, 소설 <쿠오바디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헨리크 솅케비츠도 있네요. 부끄럽지만, 전 이번에 폴란드를 여행하면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폴란드인이란 사실을 알았답니다.
사실 폴란드는 '전쟁' 보다 '문화 강국'의 이미지가 더 강한 국가가 아닐까 합니다.
동유럽 여행의 마지막 국가 폴란드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큰 기대감은 없었더랬습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이미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하지만 그 것은 저의 어리석은 오만이었음을, 그 현장에 가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본다는 것의 차이를 그 때처럼 절실히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감당하기가 어려운 감정을 느꼈어요), '폴란드의 경주'라고 할 수 있는 크라쿠프와 수도 바르샤바에서 며칠동안 머무르며 길다면 길었던 동유럽 여행을 정리하고 귀국하려는 계획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저는 폴란드를 정말 너무 몰랐더라구요. 버스를 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슬로바키아를 거쳐 폴란드 남부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집집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꾸며진 정원들이 눈길을 끌었고, 어디를 보나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 풍경들이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런가하면 도심식당가와 술집 밀집 지역들에선, 놀 때는 뜨겁게 놀 줄 아는 폴란드 시민들도 만났죠.
크라쿠프&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소금광산&바르샤바 등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폴란드는 한마디로 아름답고, 청결하고, 자연을 너무 사랑하고, 열정적인 국민들이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관광객 모드로 돌아가 폴란드 여행을 추억해봅니다.
500여년동안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던 크라쿠프는 2차세계대전 때 포화를 기적적으로 피해 오랜 문화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던 곳들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뒤의 건물은 14세기에 지어져 16세기 중반에 재건된 ,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직물 길드관(Sukiennice)입니다. 현재는 각종 가게들이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호박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아서 놀랐는데, 폴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호박보석 생산국가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네요. 특히 자유노조운동으로 유명한 그단스크가 최대 산지라고 합니다. 호박은 발트해 연안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특히 폴란드 땅에 속하지만 러시아령인 칼리닌그라드는 전 세계 호박의 수도 격이라고 하네요. 호박은 고대부터 중요한 교역품 중 하나로, 북유럽 발트해에서 시작해 러시아 모스크바, 키예프(키이우)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과 에페수스를 지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이어지는 무역로를 '호박 로드(앰버 로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직물회관 내 상점에 전시돼있는 호박장신구들.
아래 사진의 문은 구도심으로 들어가는 성 플로리안게이트로, 1300년 침입자로부터 구시가를 지키기 위한 성벽의 게이트로 만들어졌습니다. 문화유적들을 어찌나 잘 관리하고 있는지, 깨끗깨끗 반짝반짝합니다.
성 플로리안 게이트를 나가면 보이는 바르바칸 요새. 1498년에 만들어졌고, 이런 형태의 요새가 남아있는 곳이 유럽 내에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문틈으로 요새 안쪽을 들여다보니 넒은 공터만 있고 별다른 시설은 없더군요.
유럽의 대도시 광장에서 늘 만날 수있는 시위자들. 크라쿠프 광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국왕들이 머물렀던 바벨 성의 모습입니다. 성 내부에는 왕실 컬렉션들이 전시 중입니다.
수도 바르샤바는 제겐 뭐니뭐니해도 '공원의 도시'입니다.
그리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도심에 이처럼 공원이 많은 도시는 처음이예요.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관리돼있더군요. 자료를 보니, 바르샤바 안에 대형 공원과 가든이 82개 있다고 해요. 바르샤바 면적의 약 40%가 녹지라고 합니다. (참고로 서울의 녹지비율은 2022년 현재 37%로 높은 편이지만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등 이른바 '도시자연공원'이 많기 때문으로, 바르샤바의 공원들처럼 시민들의 접근성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도심녹지비율이 고궁들을 합쳐도 약 8.5%에 머물러, 이를 15% 선으로 끌어올리는게 서울시의 목표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르샤바의 재건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바르샤바는 2차 세계대전 때 철저히 파괴됐다고 합니다. 특히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 때 독일 점령군이 바르샤바 구시가의 90% 이상을 파괴했다고 해요.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는 대대적인 바르샤바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당시 구호가 "벽돌 한 장까지" 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바르샤바 재건 프로젝트는 이후 많은 유럽 국가에서 벌이던 도시화 및 보존적 도시 개발의 원칙에 큰 영향을 끼쳤고, 20세기 후반 도시의 통합적 재건 및 복구 기술의 모범이 됐다고 해요. 198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는 ‘바르샤바의 물리적 재건은 폴란드 국가 내부의 힘과 결의를 기반으로 하며,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규모로 유산의 재건이 이뤄졌다’고 평가하면서, 이른바 '바르샤바 역사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도시 보존 원칙과 실행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유럽의 독특한 사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네요.
아래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넋놓고 바라보게 되는 와지엔키 공원의 호수와 궁전 모습입니다. 이 공원은 정말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어서 지쳐버리고 말 정도였어요.
공원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는 시민과 관광객들..
아래 사진은 구도심으로 향하는 노비 스비아트 (Nowy Świat. 신세계) 거리 풍경입니다. 종이 하나없는 깨끗함이라니!!
노비 스비아트 거리 한쪽에 있는 성십자가 성당. 제가 바르샤바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입니다.
왜냐면 쇼팽의 심장이 이곳에 안치돼있기 때문이죠.
쇼팽은 1849년 프랑스에서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는 죽기 전 누나에게 자신의 심장을 폴란드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죠. 장례식을 치른 후 누나는 심장이 담긴 병을 바르샤바로 가져갔고, 결국 쇼팽의 소원대로 그의 심장은 성 십자가 성당 기둥 아래에 안치됐습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때 성 십자가 성당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쇼팽의 심장은 어떻게 됐을까요?
다행히도 쇼팽의 심장은 피해를 입지 않고 보존될 수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독일군 사령관 덕분이었지요. 그의 이름은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프스키. 당시 나치 친위대 사령관으로, 폴란드 혈통이었다고 합니다.열렬한 음악 애호가였던 그는 '바르샤바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나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1944년 8월 봉기 진압작전을 시작하기 전 성당에 있는 쇼팽의 심장을 가져갔다가 , 바르샤바 근처 밀라노벡 대주교 교구에 전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에게 바치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그의 몸에 폴란드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어쨋든 그 덕분에 쇼팽의 심장은 전쟁이 끝난 후 성 십자가 성당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바흐-젤레프스키는 종전 후 전범 재판정에 섰고, 전쟁 전 저지른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수감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Erich_von_dem_Bach-Zelewski
그러고 보니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실제 주인공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 바르샤바 게토의 한 건물에 숨어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거실로 내려왔다가 독일군 장교와 마주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이 장교가 슈필만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라고 물어보니 "피아니스트이다"라고 답하죠. 마침 그 거실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는데, 장교는 "한 곡 쳐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때 슈필만이 연주한 곡이 쇼팽의 발라드 1번 G마이너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슈필만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실화입니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연주한 곡은 쇼팽의 녹턴 20번이었다고 해요.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가장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좀 머뭇거렸던 슈필만이 어느새 독일군 장교 앞이란 사실도 잊고 생애 마지막 인양 열정적으로 연주를 하던 모습,
그렇지 않아도 전쟁에 대한 회의와 염증을 가지고 있었을 독일군 장교의 얼굴에 드러나던 놀라움과 감동, 그리고 슬픔.
이 장교도 종전 후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사망했다고 하죠.
정말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가진 성십자가 성당의 쇼팽 심장 앞에 드디어 서 봅니다. 음악으로 늘 감동과 위로를 주시는 쇼팽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성당 앞에 있는 그 유명한 쇼팽 벤치에도 잠시 앉아 음악에 귀기울여봅니다. 버튼을 누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음악벤치!
이날 저녁에는 소규모 살롱에서 열리는 쇼팽 피아노 연주 공연에도 참석했습니다.
걸음을 더 옮겨 구시가 구역의 잠코비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른쪽의 붉은 색 건물은 왕궁으로, 역시나 재건된 건물입니다.
아래 사진은 왕궁 근처 한 벽면에 새겨진 인어조각상입니다. 바르샤바의 상징인 칼과 방패를 든 인어상인데 '시렌카'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인반수의 세이렌(또는 사이렌)과 비슷한 존재이죠. 전설에 따르면, 바르샤바 옆을 흐르는 큰 강인 비스와 강가에서 시렌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부유한 상인이 시렌카를 돈벌이로 삼기 위해 잡았다고 해요. 이를 알게 된 어부의 아들과 친구들이 시렌카를 구출해냈고, 시렌카는 그 보답으로 당신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검과 방패를 든 모습이 된 것이랍니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식 만두 요리 피에로기 사진을 올려봅니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못지 않게 폴란드 인들이 만두에 진심인 줄 진짜 몰랐습니다.
우리나라 만두 보다는 조금 자그마한 크기인데, 안에는 치즈나 고기 등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갑니다.
맛은 솔직히 제 취향은 아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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