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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지구에서 '이-팔 갈등'을 생각하다

bluefox61 2024. 2. 13. 19:28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를 찾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화려한 야경으로 유명한 국회의사당과 요즘 한국 여행자들에게 '사진 맛집'으로 유명한 어부의 성에서부터 여행일정을 시작할 겁니다. 저 역시 그랬지요. '어부의 성'은 과연 한국인들로 바글바글대더군요. 심지어 돌벤치에 잠시 앉아있는데, 어디에선가 휴대전화 벨이 울리더니 한 남성이 전화를 받으며 "네, 부장님"이라고 답하더라구요. 아마도 현지 한국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인인 듯 싶었습니다. 아무튼 여기가 부다페스트인지, 한국인지 모를 정도로, 약 3주에 걸친 동유럽 여행 중 가장 많은 한국인들을 만난 곳이었어요. 

 

그리하여, 저는 부다페스트의 유명 관광지들은 건너뛰고,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부다페스트에서 홀로코스트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마침 저희 숙소가 유대인 구역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숙소를 잡을 땐 유대인 구역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짐을 풀고 나오자 마자 우리가 묵고 있는 이 지역이 심상치않다는 느낌이 들었죠.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철판에 히브리어와 영어로 씌여진 내용을 읽어보니, 이 지역이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라는 겁니다. 

 

그리 멀리 않은 곳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교 예배당인 '도하니 街 시나고그'도 있습니다.19세기 중반에 완공된 무어 양식의 이 건물 내부에 들어가면 무려 3000여명을 수용할 수있는 화려한 예배당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유럽에서 많은 성당과 교회,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 봤지만 유대교 시나고그 내부를 직접 보기는 처음입니다.

특이한 것은 언어별로 해설사들이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었어요. 아마도 전 세계에서 온 유대인과 관광객들에게 각국의 언어로 이 시나고그의 특별한 역사와 부다페스트 유대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를 설명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참 철저한 민족이란 사실을 새삼 느꼈네요. 

 

이 시나고그는 예배당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 희생자 묘지, 부다페스트 유대인들이 어떻게 나치의 탄압을 받았는지를 사진자료로 보여주는 갤러리, 그리고 이 지역 유대인들이 남긴 중요한 유물 등을 보여주는 박물관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복합 문화시설이더군요. 그래서 입장료가 좀 비쌌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시나고그 앞에서 마주친 자그마한 돌판에 새겨진 글씨를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시나고그가 있는 지역이 시오니즘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테오도르 헤르츨의 생가 터라는 설명이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시오니즘의 아버지인 헤르츨의 흔적을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헤르츨이 태어나기 한해 전에 시나고그가 완공됐고, 그가 가족과 함께 부다페스트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한 때가 1878년이라고 하니, 그는 아마도 이 시나고그를 직접 드나들며 기도를 올렸겠지요.

 

바로 이 분입니다. 

유대 민족의 국가를 다시 세워야겠다는 움직임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헝가리의 유대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1896년 출간한 <유대 국가: 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란 책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구체화된 겁니다. 헤르츨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1차 시온주의자 총회를 열어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선언을 이끌어냈어요. 이같은 움직임 속에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상당수가 실제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땅이었는데, 합법적으로 땅을 구매해 정착한 유대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갈등이 악화됐습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영국은 프랑스 등 승전국들과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자기네 입맛에 맞게 분할해 점령했고, 팔레스타인 땅을 위임통치령으로 차지했어요. 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지 2년 뒤인 194711, 국제연합(UN)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해 아랍 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각각 세우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을 환영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격렬히 반대했지요. 이스라엘은 1948514일 아랍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지요. 

 

시나고그 지하에는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및 친나치 정권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돼있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헝가리는 원래 주축국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1943년 소련군에 참패하면서 비밀리에 연합군과의 평화협정을 추진했다고 해요. 그러자 독일은 1944년 헝가리를 전격 점령하고 괴뢰정권을 세웠습니다. 당시 헝가리의  유대인 인구는 80여만 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괴뢰정권은 독일의 지시에 따라 헝가리 유대인 44만 명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냈죠.

 

1944년 늦가을, 독일은 점점 소련군에 밀리게 되자 전선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헝가리에 있던 병력을 철수하면서 '헝가리의 나치'로 불리는 '화살십자가 당' 정권에 유대인 말살 임무를 맡겼다고 합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습니다. 날씨가 춥기도 했지만, 불과 서너달 동안 무려 4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학살 당했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진들은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화살십자당은 1939년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을 기반으로 창당됐습니다. 창당자는 살러시 페렌츠. 고대 헝가리 인의 상징인 화살 상징을 내세워 '화살십자당'이라고 불렸는데, 나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와 비슷해 보입니다. 1939년 5월에 실시된 헝가리 총선에서 2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화살십자당은 헝가리 의회 전체 의석 가운데 29석을 차지하면서 헝가리의 유력 정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한때 불법화됐다가 1944년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한 후  페렌츠가 헝가리 총리에 취임하게 됩니다.  페렌츠는 종전 후 헝가리 인민재판정에 섰고, 사형선고를 받아 1946년에 처형됐습니다. 

 

자료를 찾다 보니, 십여년전 국내에서 이런 일도 있었네요. 정말이지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듯합니다... 

 

https://www.sportsseoul.com/news/read/139016

 

신인 걸그룹 프리츠, '화살십자당' 나치즘 의상 착용? 알고 보니…'헉'

 

www.sportsseoul.com

 

시나고그 옆 정원에는 홀로코스트 기간에 사망한 사람들의 묘소들이 있고, 

 

뒷편 공원에는 이런 기념 조형물도 있습니다. 스웨덴 인이라니, 이름의 발음은 라울 발렌베리입니다. 

 

 

이 분이 바로 라울 발렌베리입니다. 당시 부다페스트 주재 스웨덴 대사관 소속 외교관이었어요. 

 

 

 나치와 화살십자당 정권의 눈을 피해 수 많은 유대인들을 피신시켰다고 해요. 그러니까 폴란드에서 유대인들을 피신시켰던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와 비슷한 인물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나고그 공원에 이런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네요.

 

아이러니한 것은 발렌베리가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했을 때 체포돼 끌려갔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나이 만 32세. 너무 젊은 청년이었네요. 그 후 그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참고로, 당시 부다페스트 게토와 주변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를 붙여봅니다. 

 

 

게토 주변에 스웨덴 대사관 분관과 안전가옥 뿐만 아니라 게슈타포 본부 등이 있었군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학살 현장의 위치도 눈에 들어옵니다. 유대인들을 강변으로 끌고 가 신발을 벗게 한 다음 총을 쏜 후 그대로 차가운 강물에 밀어넣어버렸다고 하지요. 

 

부다페스트에서 끔찍했던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흔적들을 마주하면서 마음이 매우 무거웠습니다. 끝나지 않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2023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일은 잔인무도한 범죄임에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의 분노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전쟁은 하마스 뿌리 뽑기를 넘어 반인도적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가자에 있는 팔레스타인 인들을 싹쓸어 죽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처럼 어느 한쪽이 모두 죽어야만 끝나는 것일까요? 증오가 증오를, 복수가 복수를 낳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고 참담합니다. 

 

이제 저희는 홀로코스트와 뗄래야 뗄 수없는 폴란드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