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그다운 죽음이다.
자욱하게 안개낀 그리스의 쓸쓸한 부둣가, 차가운 눈발이 날리는 어느 지방 소도시의 거리, 내전으로 찢겨진 발칸반도를 떠돌아다니며 힘없는 민초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들의 슬픔과 위엄을 평생 필름에 담아냈던 영화감독의 죽음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을 것같은 느낌이다.
그리스 영화계의 위대한 거장, 스크린의 시인으로 불렸던 76세 노장감독 테오 앙헬로풀로스가 25일 세상을 떠났다. 수도 아테네의 주항구인 피라에우스에서 영화 촬영 세트장쪽으로 가기위해 길을 건너려는 순간, 갑자기 오토바이 한대가 튀어나오더니 앙헬로풀로스를 쳤다. 노감독은 차가운 아스팔트에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고,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자신의 영화제목대로 그는 치명적인 '하루'를 지나 '영원'의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그가 촬영하고 있던 영화는 '또다른 바다'. 지난해 한 현지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앙헬로풀로스는 다음 영화의 주제가 재정위기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인들의 삶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는 경제난으로 인해 미래의 희망까지 잃어버린 그리스의 보통사람들을 그릴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새 영화를 만들 자금을 얻기가 어렵지않았을까. 재정위기로 인해 유럽의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나라, 흥청망청대는 복지잔치로 정부를 거덜내버린 국민, 노동윤리란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게을러빠진 사람들 쯤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그리스 국민들에게 세계적인 예술가이자 '살아있는 지성'으로 존경받는 앙헬로풀로스의 갑작스런 죽음은 비극이다. 그의 죽음 그 자체가 무너져내리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스는 한국과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반도지형이란 점부터 로마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 우리의 일제시대처럼 독일 나치 점령체제를 겪었고, 이후 냉전체제에서는 내전의 아픔을 치러야했고, 군부쿠데타와 독재시대를 통과한 점도 우리과 똑같다. 정서도 비슷한 점이 적지 않아서, 옛 그리스 영화를 보면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여인들이 가족의 죽음앞에서 온몸을 뒤틀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모습은 우리의 옛 여인네들과 매우 흡사하다.
코스타 가브라스와 함께 그리스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인 앙헬로풀로스는 독일나치체제와 내전,쿠데타 등 그리스 현대사의 격동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다. 35년 아테네에서 태어나 60년 파리로 유학갈 때까지 법학을 공부했던 그는, 프랑스 최고의 영화학교인 고등영화연구소(IDHEC)에 입학한지 1년만에 교수들과 싸우고 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한 그는 1970년 첫 장편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누아르풍의 연출스타일로 평단의 인정을 받았다. 범죄를 소재로 한 일종의 장르영화였지만, 그는 데뷔작에서부터 그리스의 가난과 절망, 황량한 풍경을 묘사하는데 큰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40여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들 중 국내영화관에서 개봉된 것은 88년작 <안개 속의 풍경>, 95년작 <율리시즈의 시선>, 98년작 <영원과 하루> 2007년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 등이다.
완성된지 약 17년뒤인 2005년 국내개봉됐던 <안개 속의 풍경>은 황량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 곳곳을 떠돌며 아버지를 찾아헤매는 소녀와 어린 남동생의 이야기이다. 아직 어린 소녀가 자신보다 더 어린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
앙헬로풀로스의 아버지 스피로는 좌파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촌에게 고발을 당하고, 붉은 12월(Red December)로 불리는 1944년의 크리스마스 무렵에 파르티잔에게 체포됐다고 한다. 그때 앙겔로풀로스 나이 9살.영화 속 남동생 알렉산더와 비슷한 나이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수 백구의 시체들 사이로 아버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오지만 이 기억은 그의 영화 곳곳에 반영됐고, 한번도 본 적없는 아버지를 찾으려는 남매의 마음에 그대로 투영됐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11살 나이에 죽은 누이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영화 속 소녀에게 불라란 이름을 붙여줬다. 아무리 힘들어도, 때론 능욕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아가는 영화 속 어린 남매는 아무리 혹독한 시련이 닥쳐도 묵묵히 감내하며 삶을 이어나가는 그리스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 영화배우 하비 카이텔이 주인공 영화감독으로 등장하는 <율리시즈의 시선>은 칸영화제에서 주목받은데 힘입어 제작된지 이듬해인 96년 국내 개봉됐다. 35년간 망명생활을 해온 영화감독 A는 새 영화 개봉으로 그리스를 찾는다. 그는 1905년 마타키스 형제가 찍었던 발칸 최초의 영화를 찾으러 온 것이다. 알바니아를 거쳐, 현재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와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보스니아 사라예보로 A의 여행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땅에 그가 본 것은 전쟁으로 찢겨져 나가고 부서져버린 마을들, 그리고 지난날의 자취들을 쓸어내버리는 폭력 등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민중들은 고통을 인내하며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잊을 수없는 장면은
거대한 레닌상이 바지선에 아무렇게나 실려 어디론가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광경이다. 강둑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는 어떤 이들은 한때 숭배시됐던 레닌이 몰락해버린데 대해 조소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레닌상을 향해 경례로 마지막 조의를 표하기도 한다. 동상을 실은 바지선은 마치 장례식장을 향해 가는 거대한 관처럼 보인다.
51회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원과 하루>는 2004년 국내개봉됐다.
안개 낀 항구 도시 테살로니키. 이 황량하고 쓸쓸한 도시의 낡은 집에서 늙은 시인 알렉산더는 외롭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벗은 자신처럼 이제는 늙어버린 개 한마리이다. 자신에게 남겨진 '하루'를 19세기 시인 솔로모스의 시어를 찾는 여행에 쓴다. 왜 예전에는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을까!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는 노시인은 곧 앙헬로풀로스 자신이다.
오늘 밤에는 앙헬로풀로스를 추모하며, 그의 영화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던 엘레니 카라인드로의 음악을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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