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이자벨 위페르

bluefox61 2008. 2. 18. 17:49

#1

여자는 비엔나 음악학교의 저명한 피아노 선생님이다. 그녀는 무대 한켠에 서서 여제자가 독주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학생은 엄격한 선생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 이때 동료 남학생 한명이 악보를 넘겨주겠다며 무대위로 올라간다. 

남자는 몇마디로 여학생을 웃기고, 덕분에 긴장이 풀어진 그녀는 평소보다 눈에 띄게 좋아진 연주실력을 발휘한다. 이 모든 것을 선생은 조용히 무대 밖으로 나가 탈의실로 들어간다. 잠깐 황망한 시선과 동작으로 옷들 사이를 걸어다니던 선생은 여학생의 코트를 찾아내고 , 유리잔 하나를 깨서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결국 연주를 마친 학생은 유리조각에 손을 다친다.


#2

남자제자를 향한 사랑을 거절당한 선생은 겹겹의 문을 헤치고 연주홀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녀의 지갑에는 칼 한자루가 들어있다. 생에 유일하게 찾아왔던 사랑을 되찾을 수도, 그렇다고 칼로 그를 찌를 수도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로 나온 그녀는 대신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른다. 흰색의 얇은 실크 블라우스 위로 새빨간 핏자국이 한 송이 꽃처럼 서서히 피어오르고, 그녀는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모르는채 어디론가 무작정 걸어간다. 


지난해 국내 개봉됐던 미카엘 하네케 감독 피아니스트에서 극의 전환점을 이루는 장면들입니다.

일상을 파고드는 폭력에 관한 한 잔혹하리만큼 리얼한 연출세계로 유명한 하네케는 이자벨 위페르란 걸출한 프랑스 여배우를 얻음으로써 피아니스트란 명작을 탄생시킬 수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피아니스트는 위페르를 빼놓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무표정 속에 수만가지의 복잡한 심리를 담아낼 수 있는 배우가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포르노비디오숍에서 타인의 욕정의 지꺼기가 남아있는 휴지를 손에 들고 냄새를 맡고, 드라이브인 극장에서 카섹스를 훔쳐보며 소변을 보는가하면, 매일밤 면도날을 들고 자신의 성기를 자해하며 흰 욕조 위에 선혈을 뚝뚝 흘리는 그런 비정상적인 여자를 추하지 않게 , 아니 지극히 우아하게 연기할 수 있는 여배우는 몇이나 될까요.


묘하게 각진 얼굴을 가진 위페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덩어리를 간직한 얼음같은 여배우라고 할 수있습니다. 

너무나 차가워서 손을 데이는 드라이아이스같다고나 할까요. 


위페르란 배우를 처음 만난 것이 8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벌써 20여년이 가까워 오는군요.

그때 저는 유럽영화광들이 거의 그랬듯이, 사간동 프랑스문화원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지하극장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스크린에서는 클로드 고레타 감독의 77년작 레이스 뜨는 여자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주근깨 가득한 낯선 얼굴의 여배우 한 명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가진 것없는 순진하고 어린 미용사는 파리 명문가의 자제이자 법대생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드러나는 두사람 간의 지적, 문화적 격차와 남자의 배신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되버리고 맙니다. 

차가운 바닷물에서 수영을 하고 난 뒤 새파래진 입술로 벌벌 떨면서도 사랑의 달콤함과 만족감을 가득 담고 있던 여자의 눈동자, 그리고 실연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린 여자의 텅빈 얼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군요. 


그때는 이자벨 위페르란 어린 여배우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대배우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지요. 


위페르는 카드린 드뇌브, 브리지트 바르도, 이자벨 아자니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미녀배우의 계보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독특한 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리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외모(그러나 중년에 들어 완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지요) 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기력으로 위페르는 동시대 배우들 중 단연 발군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대표작으로는 프랑스 누벨바그영화의 명장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마담 보봐리초콜렛 고마워를 비롯해 커티슨 헨슨 감독의 베드룸 윈도우, 그리고 최근작인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 등이 있습니다. 특히 8명의 여인들에서는 오버하기 좋아하는 주책바가지 노처녀로 등장해 코미디 연기에도 재능이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몇해전 발표한 브누아 자코 감독의 육체의 학교 에서도 젊은 남자의 매력적인 육체를 돈으로 사는 중년의 성공한 디자이너로 출연해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것이 기억나네요. 


“이 세상에는 당신을 두렵게 만들며, 당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듯한 영화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이야말로 결국 모든 것을 준다. 바흐,슈베르트, 모차르트에게 감사한다.”


위페르가 2001년 피아니스트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남긴 소감입니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발언 아닙니까.


55년생이니까 위페르의 나이도 올해 53세가 됐군요. 

누구나 세월에 길들여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들처럼 순화되기를 거부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용감해지는 이 위대한 여배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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