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가 23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싱가포르 총리실은 이날 성명을 통해 "리 전 총리가 오늘 오전 3시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발표했다.리 전 총리는 지난달 5일 폐렴으로 입원한 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왔다. 리 전 총리의 맏아들인 리셴룽(李顯龍)총리는 23일부터 29일까지를 국가 애도 기간으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애도 기간에는 리 전 총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든 정부 건물에 달린 싱가포르 국기가 조기로 게양될 예정된다. 리 전 총리의 시신은 25일부터 28일까지 싱가포르 국회 의사당에 안치되며, 장례식은 29일 오후 2시에 싱가포르 국립대에서 국장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리 전 총리는 식민통치 시절인 1959년 자치정부 총리 취임 때부터 1990년 퇴임까지 총 31년,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취임 때부터 치면 25년간 정상 자리를 지키면서 정치,경제,사회 정책은 물론 주택,언어, 심지어 청결 문제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싱가포르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3일 성명을 통해 "싱가포르의 국부인 리콴유 전 총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고인은 역사의 진정한 거인, 현대 싱가포르의 아버지, 아시아의 위대한 전략가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23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말레이 반도의 작은 항구도시에 불과했던 싱가포르를 오늘날 아시아는 물론 세계 최고의 부국 중 하나로 일궈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국부(國父)’라는 호칭에서 나타나듯 그는 영국 식민통치 시절인 1959년 자치정부 총리 취임 때부터 1990년 퇴임까지 총 31년,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취임 때부터 치면 25년간 정상 자리를 지키면서 정치,경제,사회 정책은 물론 주택,언어, 심지어 청결 문제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싱가포르의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 전 총리는 지난 2007년 8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의 비약적 성장 비결 또는 자신의 통치 철학을 "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ideology-free),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실용주의"를 꼽으면서 "국가시스템은 인종, 언어, 종교와 무관하게 작동해야 하며 그렇지 않았다면 싱가포르는 진작에 쪼개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강의 정부를 만들기 위해 엘리트들을 최고로 대우해 관료로 적극 유치한 것도 리 전 총리 특유의 통치 철학에 따른 것이다. 그는 1998년 출간한 자서전 ‘싱가포르 스토리’에서 "1959년 총리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정부의 모든 사무실마다 에어컨디셔너를 설치한 일"이라며, 공무원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일에 몰두할 수있게 해준 에어컨디녀서를 ‘싱가포르의 1등 공신’이라고 꼽은 적이 있다.
여론에 좌우되는 포퓰리즘, 즉 대중영합 정치를 극도로 혐오했던 리 전 총리는 "유권자의 표는 정책을 실행한 결과가 정한다"는 소신을 평생 지켜왔다. 자타가 공인하는 마키아벨리 골수 추종자였던 그는 타협을 거부하는 고집불통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지난 2005년에는 평생의 원칙이었던 도박 금지를 버리고 후계자인 고촉동(吳作棟)정부의 카지노 건설정책을 지지해 유연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그가 밝힌 ‘입장변화’의 이유는 간단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싱가포르가 생존하는데 필요하다면 한다"는 것이었다.
리 전 총리는 1923년 영국 식민통치하의 싱가포르에서 부유한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2~45년 일본군의 폭압적 점령을 경험했던 그는 1946년 영국 유학길을 떠나 1947년 캠브리지대 법학과에 입학해 1950년 영국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후 같은해 8월 귀국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954년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한지 불과 5년만인 1959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35세 나이에 자치정부 총리로 취임했다.
리 전 총리가 반세기 넘는 기나긴 정치 인생에서 겪은 최초의 시련은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과의 합병 좌절이었다.말레이시아 정부가 "중앙 정부에 어떤 존경심도 보이지 않은 싱가포르주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며 일방적인 퇴출을 발표하자, 리 당시 총리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너무나 고통스런 순간"이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후에도 그는 영국 군의 전격적인 싱가포르 철수(1971년),1970년대 오일쇼크, 1980년대 중반 경기침체 등 숱한 고비를 극복하고 변변한 자원하나 없는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금융 및 서비스 중심지로 우뚝 일으켜 세웠다. 독립 당시 400달러 수준이었던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총리직에서 퇴직한 1990년에 1만2750달러를 달성했으며, 2013년에는 1인당 GDP가 6만2400만달러를 기록했다.
1990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선임장관, 고문 등으로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리 전 총리의 리더십에는 항상 비판과 논란이 항상 뒤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최측근이었던 고촉동에게 총리자리를 물려준데 이어 2004년부터 현재까지 첫째아들 리셴룽 (李顯龍)이 총리직을 잇고 있어 세습정권이 아니냐는 논란이 적지 않다.
부정부패 일소를 명분으로 언론자유를 억압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벌금과 처벌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리콴유 체제를 ‘개발독재’로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따라서 ‘리콴유없는 싱가포르’가 기존의 정치,경제 모델을 유지하면서도 21세기적 가치를 어떻게 포용할 것인지가 향후 중대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개발도상국가 지도자들의 롤모델이었던 그는 10.26사태 발발 1주일전인 1979년 10월 19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총 4번 한국을 찾았다.
2000년 9월 출간된 회고록 ‘일류 국가의 길’에서 리 전 총리는 21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박정희 대통령)의 20대 딸 박근혜의 통역으로 우리의 대화는 진행됐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밖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 관련해 "그들은 집권했던 시기에 통용되던 그 당시의 기준에 따라 행동했다"며 "그러한 기준에서 판단한다면 그들은 악한(villain)은 아니다"라고 평했는가 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 노 두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것과 관련, "다른 나라의 집권 중인 군부 지도자들에게 대중적 지지를 추구하는 민간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이양해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그릇된 메시지를 전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논쟁으로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지난 1994년 포린어페어스와의 인터뷰에서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면서, 서구적 가치관과 정치체제의 한계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문화는 숙명인가’라는 한마디로 "리콴유의 그릇된 주장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1999년 리 전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두 사람이 ‘아시아적 가치’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자리(아태민주지도자회의와 전경련국제자문단회의)에서 논쟁을 이어나갔던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이 논쟁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에 이어 극단 이슬람주의가 휩쓰는 2015년 중동 ·북아프리카 정세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81년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건설에 참여할 때 리콴유 당시 총리는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사장을 집무실로 불러 5분짜리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고 이 전대통령은 집권때 리콴유의 기업친화철학을 국정운영에 반영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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