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제가 사랑했던 책들 중 <대세계의 역사>전집이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끼고 살다시피할 정도로 그 책을 너무너무 사랑했었죠. 이 글을 쓰면서 혹시~~ 하고 찾아봤더니, 기억하고 있던대로 역시나 삼성출판사에서 출판된게 맞네요. 책을 좋아하는 딸내미를 위해 아버지께서 아마도 거금을 내고 집에 들이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는 그 책의 광고입니다. "서가에 하이센스한 품격을 더해주는"이라고 했는데, 품격까지는 모르겠고, 겉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또 읽고 했던 기억은 납니다.
그 책의 특징은 통사적 시각뿐만 아니라 당시엔 드믈게 칼라사진 도판이 매우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아있는 많은 사진들 중엔 앞부분만 남은 오래된 돌건물 사진도 있었어요. 로마시대에 세워진 도서관 유적이란 설명이었죠. 그 때는 어디에 있는 유적인지 몰랐지만, 한참 지나 터키(튀르키예)의 에페수스(에페스) 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책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그 에페수스 도서관 실물을 드디어 영접하니, 감격스럽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튀르키예 3대 도시 중 하나라는 에게해 연안의 이즈미르에서 기차를 타고 셀축역에 내린 다음 돌무쉬를 타고 에페수스로 이동했습니다.
아래는 셀축역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로마 시대 수도교 유적입니다. 유럽 곳곳을 다니다보면 수도교 유적을 심심치않게 만날 수있는데, 볼 때마다 그 규모가 놀랍습니다.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동력이 없던 시대에는 물의 낙차를 이용해 수원(水源)으로부터 도시로 물을 가져왔는데, 로마인들은 지형을 극복하고 물이 일정 낙차를 유지하며 흐르게 하기 위해 높은 수도교를 건설했지요. 셀축 인근의 에페수스가 약 2000년 전에는 워낙 대규모 도시였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충분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선 이런 수도교가 필수였겠지요. 자료를 찾아보니, 수십킬로미터 밖에 있는 수원에서 얻은 물을 이 수도교로 초당 61리터가량 흘려보냈다고 합니다.
수도교 작동원리는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셀축 수도교는 물이 지나가는 윗부분의 터널형 구조물은 모두 부서지고 아래를 받치는 아치 교각만 남아있네요.
에페수스로 향하기 전에 전통시장 구경부터 합니다. 과일, 올리브, 야채, 달걀 등 온갖 식재료들을 팝니다. 한국에서는 보기힘든 아티초크도 그득그득 쌓여있습니다. 이걸 직화로 구워먹는 것같던데, 맛이 궁금하네요.
너무 싼 체리 한봉지 사들고 에페수스로 갑니다.
서양 정물화에 많이 나오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아티초크
입장료를 내고 북문을 통과해 조금 걷다보면, 바로 대형 원형극장이 나옵니다. 서기 1~2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극장의 최대 수용인원은 약 2만5000명. 이 정도의 극장을 수용할 정도라면 인구가 약 10배에 달하는 약 20만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보존상태는 히에라폴리스의 원형극장 보다 다소 못하지만, 높이 18m의 거대한 규모가 압도적이더군요.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아테네의 왕 코드로스(기원전 11세기경)가 죽자 아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 중 한명인 안드로클로스는 신전을 찾아가 새로이 왕국을 건설할 자리를 신께 물었습니다. 신탁은 "물고기와 돼지를 따라 가서 나오는 곳에 왕국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자는 신탁대로 물고기를 따라 에게해를 넘어 소아시아 해안에 도착한 후 다시 돼지를 따라가던 중 발견한 땅에 에페수스를 세웠다고 합니다. 전설같은 이야기이지요.
아테네의 식민도시였던 에페수스는 소아시아 연안의 이오니아(Ionia) 문화 중심지로 성장, 이오니아 연맹 12개 도시의 맹주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쇠퇴했지만,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 뒤 재건되어 헬레니즘 도시로 부흥했죠. 기원전 129년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에는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해 당시 4대 무역항 중 하나였다고 해요.에페수스는 기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곳에서 요한복음서가 만들어졌고,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아시아 7개 교회의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의 무덤과 성모마리아가 최후까지 머물렀던 집 유적도 남아있지요.
에페수스는 서기 263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가 그후 재건되었으나 , 강물에서 유입되는 침전물로 항구가 폐쇄되면서 빠르게 쇠퇴했고, 614년 대지진으로 도시는 거의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폐허로 남아있던 에페수스가 본격적으로 발굴된 것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고고학자 오토 벤도르프에 의해서입니다.
아래 사진은 에페수스의 대표 유적지 켈수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가에서 만난 고양이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기둥을 깔고 앉아있네요.
아래는 사창가 출입 시 연령 인증용이었다는 그 유명한 발 조각입니다. 다들 여기서 사진 한장씩...
드디어 켈수스 도서관입니다.
이 도서관 건물은 로마 집정관 켈수스 폴레마에아누스를 위해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킬라 폴레마에아누스가 지은 2층 건물로, 117년 공사를 시작해 135년 완공했습니다. 한때 1만2000개 이상의 양피지 두루마리 문서를 소장해, 로마시대 3대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서관이었다고 하지요. 화려한 대리석 기둥과 빼곡한 조각들을 보면,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건물을 개인이 지을 수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 곳은 도서관 뿐만 아니라 켈수스 묘소도 함께 있었던 일종의 복합 시설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262년 화재로 다량의 도서가 소실되었으며, 10세기 ~ 11세기에 발생한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합니다.
전성기때 켈수스 도서관은 아래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건물 전면부에는 지혜,용기,지식, 사려심 등을 상징하는 여신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래 조각상은 지혜의 여신 '소피아'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조품이고, 원본은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있습니다.
켈수스 도서관을 포함한 에페수스 발굴작업은 19세기말~20세기초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뤄졌고, 1970~1978년 독일 고고학자 볼커 미카엘 스트로카에 의해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진행됐습니다. 돌조각들을 하나하나 짜맞춰 건물의 전면부(파사드)가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된 겁니다. 파사드 안쪽은 밋밋한 돌로만 돼있습니다.
이 문을 넘어가면 아래와 같은 아고라 유적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도서관 건물과 아고라가 사실상 연결돼있었던 것이지요. 꽤 큰 규모로, 빙 둘러서 빵가게, 옷가게 등 많은 가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활기찼을지 상상됩니다.
켈수스 도서관을 지나 언덕길인 쿠레테스 길을 걸어갑니다. 길 양쪽으로 아름다운 유적이 너무 많아 일일이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이더군요.
헤라클레스의 문으로 이어지는 언덕길
문 안쪽에 새겨져 있는 조각상이 바로 '메두사'입니다. 꼬불꼬불한 머리를 하고 있는데, 뱀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아래 사진은 에페수스 고고학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아르테미스여신상'입니다.
고대 조각에는 이렇게 가슴이 여러개 달린 여신상들이 있는데, '아르테미스 여신상'도 여러개의 가슴으로 다산과 풍요에 대한 기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페수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했다고 하는데, 아르테미스 신전의 일부가 남아있지요. 이런 여신상을 신전에 모셨던 듯합니다.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 사냥의 여신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서양 회화나 르네상스 시대 조각상에는 보통 활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 그 이전에는 이처럼 여러개의 가슴을 가진 여신으로 형상화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자료사진)
이제 에페수스를 떠나, 현대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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