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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역사여행-⑤앙카라 : 아타튀르크를 찾아서...

bluefox61 2024. 8. 13. 16:06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분들 중 수도 앙카라를 찾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아무래도 튀르키예 관광의 중심은 이스탄불이고 앙카라는 행정수도의 이미지가 강해서이겠지요. 특히 오스만제국이 망하고 20세기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가 된 곳이어서 역사적 관광지가 많지 않을 것이란 느낌 때문이기도 한 듯합니다. 

 

제가 앙카라를 여행하고 보니, 확실히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떨어지는게 사실입니다. 

앙카라의 역사는 기원전 2000년 경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고대 유적지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더군요. 

아래 사진은 앙카라 구시가지역인 울루스에 있는 앙카라 성의 모습입니다.

 

앙카라는 1356년 2대 술탄때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차세계대전 종반쯤  민족주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케말 아타튀르크)가 앙카라에 저항운동본부를 세워 활동했던 곳이지요. 그리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스탄불 대신 앙카라가 수도가 됐습니다. 

                     

 앙카라 성은 7세기 전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입니다. 원래는 기원전 8세기경에 이곳에 요새가 있었는데, 이후 여러차례 확대 및 재건됐다고 합니다. 

 

앙카라 성벽에 새겨진 로마 글자

 

아래 사진은 앙카라 성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앙카라 시내의 모습입니다. 

앙카라 시 전경

 

성을 내려와, 이제 앙카라의 실질적인 '주인공'을 만나러 갑니다. 

바로 무스타파 케말(1881~1938)입니다. 그의 이름에 붙는 '파샤'는 오스만제국 시절 고위급 관료 또는 장군에게 붙는 호칭으로 영어식으로 '경(sir)'  또는 '지도자'란 뜻이라고 합니다.  '아타튀르크'란 '튀르크의 아버지'란 뜻이지요. 

 

이스탄불이 메메트 2세의 도시라면, 앙카라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타튀르크의 도시입니다. 

 

아타튀르크는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입니다. 그는 1922년 무혈혁명을 일으켜 술탄 메흐메트 6세를 폐위하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렸지요. 이듬해에는 공화제를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1924년에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핵심 기본정신인 세속주의를 헌법으로 제정했지요. 1925년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했고,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했으며, 1928년에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누구나 배우기 쉬운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으며,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습니다.

 

튀르키예가 이슬람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종교와 정치를 철저히 분리한 세속주의에 입각한 현대국가로 발돋움할 수있었던 데에는 아타튀르크의 공헌이 매우 큽니다. 

 

앙카라에서 반드시 봐야할 곳은, 단연 아타튀르크의 영묘가 있는 '아느크카비르'입니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아느크카비르' 한마디만 했는데 단박에 알아듣고 데려다주더라구요. 거리상 앙카라 성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아느크카비르는 '추모의 묘'라는 뜻입니다. 직접 가보니까 드넓은 '평화공원'과 아타튀르크 영묘, 그리고 기념관 박물관 등으로 구성돼있더군요. 

 

 

아타튀르크 영묘 아느크카비르로 향하는 입구

 

영묘가 있는 광장에 서면 말로는 표현할 수없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건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돌바닥 등 건축적 아름다움이 가슴 깊이 느껴집니다. 아타튀르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튀르키예 국민들의 마음도 느껴지고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앙카라 시내 어디에서든 잘 보이더군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요. 

아타튀르크 영묘

 

아느크카비르는 1941년 튀르키예 정부가 개최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를 만들기 위한 디자인 대회에서 선정된 건축가이자 교수인 에민 오낫과 조교수인 아흐멧 오르한 아르다가 설계했습니다. 건축에 사용된 돌은 튀르키예 곳곳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영묘 안에 마련된 아타튀르크의 묘입니다. 돌로 된 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묘이고, 실제 관은 바로 밑 지하층에 따로 마련돼있어요. 박물관 쪽으로 들어가면 시신이 안치된 관 앞의 문을 볼수있다고 하는데, 저는 가보지는 않았어요.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더라고요)

아타튀르크 무덤

 

아래 사진은 영묘 벽에 새겨진 아타튀르크의 연설문 일부입니다. 설명문을 보니, 1938년 10월 29일 아타튀르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라고 하네요. 같은해 11월 10일에 돌아가셨으니, 숨지기 불과 열흘남짓 전입니다. 

 

마지막 줄에서 "군인 여러분들이 내부와 외부의 그 어떤 위험에도 맞서 조국의 영예와 문명을 지켜낼 준비가 돼있으리라 확신한다"고 강조하셨네요. '외적 위험'은 물론이고,  특히 '내적 위험'을 언급하신게 인상적입니다. 튀르키예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위험이 제기될 수있다고 보신 것이지요.

 

레제트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이슬람주의를 우려하는 시선과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현재 튀르키예 상황을 아타튀르크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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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침묵시위 급속 확산… ‘서있는 남자’ SNS통해 퍼져

‘빨간 원피스의 여인’에 이어 ‘서있는 남자(터키어로 ‘두란 아담’)’가 터키 반정부 시위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점거시위대가 쫓겨난 이스탄불 탁심 광장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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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격렬시위 뿌리는…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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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군 교대식

 

아타튀르크에 대한 튀르키예 인들의 존경과 사랑은 대단하더군요. 어딜가나 아타튀르크 사진이 국기와 함께 걸려있는 것을 볼 수있었습니다. 아래는 이즈미르의 한 학교 모습입니다. 

이즈미르의 한 학교 앞에 내걸린 국기와 아타튀르크 사진 플래카드

 

1453년 메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쳐  현대 튀르키예에 이르기까지 튀르키예 역사여행을 앙카라에서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