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여행

튀르키예 역사여행-⓵이스탄불 : 술탄 메메트 2세를 찾아서...

bluefox61 2024. 8. 6. 13:32

"스물 한 살의 젊은이는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났을때 대신들과 장군들, 거기에 이슬람교 고승들까지 거느리고 예니체리 군단 정예병의 호위를 받으며 카리시우스 문을 지나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그는 이제서야 자기 것이 된 이 도시를 차분히 음미하려는 듯 큰 길 위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성 소피아 대성당 앞까지 왔을때 메메트 2세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몸을 숙여 한줌 흙을 쥐어 터번 위에서부터 흩뿌렸다...

 

성 소피아 대성당을 나온 술탄은 근처에 있는 황폐해진 구 황궁에 들른 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고대 로마식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연후에 또다른 큰 길을 따라 페가에 문을 지나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술탄의 순시가 이뤄지는 동안 저항의 총소리 하나 나지 않았고, 정복된 사람들 중에 말 앞을 막아서는 사람 하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술탄 메메트 2세 앞에 완전히 굴복한 것이다. 

비잔틴 제국은 지상에서 소멸하고 그 자리에 투르크 제국이 출현했다." 

                                           

 (시오노 나나미 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 )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

 

 

제 휴대전화 메모장엔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 파일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10곳이지요. 이 글을 쓰기 전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이 몇 위인가 다시 보니 2위이네요. (참고로 1위는 이탈리아 피렌체. )

이스탄불 여행은 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올해 드디어 이뤘죠.

 

왜 제가 이스탄불에 오랫동안 매료됐는지를 간단히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동서양의 문화가 합쳐져 찬란한 꽃을 피운 도시란 점 때문이기도 하고, 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행지란 점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리스로마부터 중세를 거쳐 근현대 유럽 및 세계사에 평생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제게 튀르키예, 그 중에서도 이스탄불은 '모든 것의 집약체'로 느껴져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작가는 "답사 여행의 최고는 폐사지(廢寺止)"라고 하셨다지요? 폐사지란 한때 융성했던 사찰이 지금은 모두 사라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합니다. 저도 고즈넉한 폐사지를 거닐면서, 한때의 화려함과 영광을 상상해보는 동시에 세월의 덧없음에 허무와 애잔함을 느껴본 적이 여러번있습니다. 여행지이나, 사람이나, 밝디밝고 찬란함만 있으면 매력이 덜 한 법입니다.(물론 개인적 취향일수도..)

 

이스탄불도 비슷한 듯합니다.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을 거쳐 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 이 나라가 수천년동안 줄곳 번영만했다면 개인적으로 매력이 덜 했을 겁니다. 한때는 영광스러웠지만 처참한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던 역사가 있었기에 이 도시가 저 뿐만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이 곳으로 이끌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는 수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입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세계사, 그 중에서도 유럽 역사가 바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고대 로마가 자기들의 세계의 모태라고 생각하던 유럽인들에게 말로 형언할 수없는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동로마제국이 쇠락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을 되찾으라고 보낸 십자군이 아무리 정교 국가라고는 하지만 같은 기독교를 믿는 동로마 수도를 공격해 점령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겁니다. 그 정도로 동로마제국은 엉망이었던 것이죠. 

4차 십자군 전쟁과 관련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s://bluemovie.tistory.com/881

 

네덜란드&벨기에에 가다-3. 브뤼허의 성혈성당

'유럽북부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벨기에 브뤼허는 오랫동안 저의 여행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계기는 영화였지요. 2008년 개봉한 마틴 맥도너 감독의 에서 두 주인공 콜린 패럴과 브렌단

bluemovie.tistory.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에게 고대 로마인들이 창설한 제국의 계승자는 동로마 제국 뿐이고, 황제라고 부르기에 손색없는 존재 역시 동로마제국 황제 뿐이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랬던 동로마 제국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천년 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주인공은 신흥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메트 2세였습니다. 바로 이분입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정복자 (Fatih) '란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요.

술탄 메메트 2세 초상

 

이 그림은 오스만 회화양식이 아니라, 서양식으로 캔버스 위에 그린 유화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베네치아 화가 젠틸레 벨리니가 1479년 메메트 2세의 부름을 받아 이스탄불로 건너가 이듬해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죠. 현재는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있습니다. 1479년이면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한지 26년뒤입니다. 메메트 2세가 1432년생이니, 만 21세에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했던 그도 40대 중반을 넘겨 50을 바라보는 중년 남자가 됐군요.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길고 뾰족한 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자그마한 입, 그리고 마른 듯한 얼굴 윤곽이 보입니다. 이 분이 그 격렬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숱한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그 분이라고요? 근육질의 군사지도자, 정복왕이라기 보다는 이슬람 철학자같은 느낌입니다. 

 

해상무역 강국이었던 베네치아는 원래부터 콘스탄티노플과 긴밀한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한 이후에도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은 베네치아에게 중요한 곳이었죠. 역으로 오스만제국에게도 베네치아는 중요한 국가였구요.  그래서 두 나라는 10여년동안 전쟁을 벌였습니다. 1479년 메메트 2세가 베네치아에게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했을 때, 사실 베네치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오스만 제국과 메메트 2세의 위용이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 나라는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메메트 2세가 베네치아 정부에게 "내 초상화를 그릴 화가 좀 보내라"라고 명령아닌 명령을 해왔을 때 발탁된 사람이 바로  젤틸레 벨리니였습니다. 이후 이 초상화는 복제화로 만들어져 전 유럽에 퍼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초상화는 메메트  2세가 오스만제국과 베네치아 평화조약을 자축하는 동시에, 전 유럽에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널리널리 알리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었던 셈입니다. 

메메트 2세는 이 초상화가 완성된지 1년 뒤인 1481년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5월 3일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마흔 아홉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독교의 적'이 죽자 유럽 전역이 환호성을 질렀고, 특히 교황은 사흘밤낮 축하연을 펼쳤다고 합니다. 

 

저는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동안 무려 600여년 전 메메트 2세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짜릿한 기쁨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튀르키예인들 중에는 디지털 비밀번호를 1453으로 쓰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메메트 2세는 지금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튀르키예와 이스탄불을 여행하고 많은 여행기들을 남기시지만, 저는 제 식으로 '역사를 따라가는 여행기'를 적어보겠습니다. 

 

그럼,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