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터키 지진과 쿠르드 민족

bluefox61 2011. 10. 26. 12:13
터키 정부가 지진피해지역 주민들에 대한 늦장 구호대처 비난 속에 앙숙 국가 이스라엘을 포함한 외국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진발생 3일째인 25일 생후 2달된 아기와 엄마 할머니 3대가 건물잔해더미에서 구조되기는 했지만 현재까지 사망자는 432명, 부상자는 1352명으로 늘어났다.

베지르 아탈라이 부총리는 25일 의회 연설에서 동부 반 지역 이재민에 대한 텐트 보급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공식인정하고, "인근 국가들로부터 구호텐트가 운송돼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들이 텐트를 공급하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외국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받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공식화한 셈이다. 
당초 터키 정부는 한국을 비롯한 해외 국가들의 원조를 거절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의회에서 제1야당 공화국민당, 쿠르드민족정당 '평화와 민주주의당(BDP)'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안이한 상황파악으로 외국의 지원을 거절했다고 질타했다. BDP측은 "지진피해지역에 왜 아직 구호텐트가 세워지지 않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없다"면서 정부를 맹비난했다. 

터키와 오랜 갈등을 겪어온 쿠르드족의 거주지역인 동북부를 정치적 근거지로 하고 있는 BDP는 이재민 구호에 소극적인 반주 주지사를 당장 파면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총리는  " 정부는 외국의 도움을 거부한 적이 없다"면서 최근 팔레스타인, 이란 문제 등을 놓고 앙숙관계가 된 이스라엘로부터도 지원을 받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터키 적신월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피해지역에 공급된 물자는 텐트 1만7239개, 모포 3430개, 히터 3425개, 음식 100t. 그러나 지진피해가 가장 심한 반과 에르지스에서는 지진이 발생한지 4일째인 26일 오전 현재까지도 영하권의 기온과 여진 공포 속에 떨면서 거리에서 지내는 이재민들이 부지기수라고 후리에트지 인터넷판은 보도했다. 

지진으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은 후리에트와 인터뷰에서 "8명의 아이들과 텐트도 없이 길거리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면서 "이곳에는 국가도, 도와주는 사람들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텐트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인근 마을에서 대표자격으로 반에 온 한 남성은 " 우리 마을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어 구호물자가 시급한 상태인데 빈 손으로 돌아가야할 판"이라면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후리에트, TRT 등 현지언론들에 따르면 이재민들 사이에서는 텐트와 물자를 가득실은 구호트럭이 약탈당했다는 소문과 권력자 가족들에게 구호품이 먼저 제공되고 있다는 근거없는 루머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지진을 계기로 투르크-쿠르드족 간의 뿌리깊은 갈등도 재연되고 있다. 일부 유명 TV 프로그램 진행자와 블로거들이 이번 지진을 쿠르드무장조직이 저질러온 테러에 대한 신의 보복으로 언급하기까지 했다. BDP 당수는 투르크계인 반주 주지사가 쿠르드계인 반 시장이 구호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건 전화를 받지 않았던 사실을 공개하면서 "이런 차별주의적 멘탈리티를 결코 받아들일 수없다"고 질타했다. 


한편 반에 위치한 교도소에서는 여진으로 인한 건물붕괴 공포에 휩싸인 죄수들이 25일 감방에서 내보내 줄 것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키는 등 치안불안도 악화되고 있다. 

(참고로, 쿠르드인들의 아픔을 알아볼 수있는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리뷰를 소개합니다. 
쿠르드 출신의 이란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2000년 작품입니다.)

할리우드 대형 오락물, 가벼운 연애담과 코미디 등이 점령한 여름시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자 기쁨이다. 
쿠르드계 이란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며 감동이 될 수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부모가 죽은뒤 가장이 되어버린 12살난 소년 아윱이 누나와 어린 여동생, 그리고 장애자인 남동생들과 생존해나가기 위해 악전고투하면서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아윱은 6.25전쟁 후 지지리도 가난했던, 가족을 위해 희생을 묵묵히 감내해내야 했던 우리 부모세대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이 땅 어디에선가 아직도 수많은 소년소녀가장들이 아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 영화는 인생경험의 폭과는 무관하게 관객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고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그것은 단순함의 힘, 진심의 힘이란 말로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영화에서 이란-이라크 국경을 넘나들며 짐을 나르는 일꾼들은 말이나 노새들이 살인적인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술을 먹인다. 어느날 술에 너무 많이 취한 말들은 매복강도를 만나게 되자 뛰지도 못하고 눈밭에 쓰러져 버리고 만다. 일꾼들은 저마다 도망쳐버리지만, 동생의 치료비가 될 전재산 노새를 포기할수없는 아웁은 노새에게 일어나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한다. 영화에서 ``취한 말``은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힘든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나가야할 ``우리``모두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이란 최초의 쿠르드어 영화로, 영화 출연진 역시 모두 쿠르드족 아마추어 배우들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밑에서 일하다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을 영화적 스승을 바꿨다는 사실에서 고바디 감독의 현실에 대한 인식, 영화적 시각 등을 짐작할 수있다. 모흐센의 딸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의 ``칠판``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사람이 바로 고바디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