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루마니아 영화가 뜬다

bluefox61 2008. 1. 11. 15:49
유럽의 최빈국으로 알려져온 루마니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미국의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최근 루마니아로부터 세계 영화의 새로운 포스(force)가 일어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계 유명 영화제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루마니아의  젊은 영화들을 집중 조명했다. 한마디로, 1989년 차우셰스쿠 공산 독재체제의 붕괴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던 루마니아가 지금은 유럽 영화의 새로운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국내 개봉 중인 코르넬리우스 포룸보이우 감독의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원제는 <부쿠레슈티 동쪽 12시 8분>)은 최근 각국 영화평단에서 뜨거운 반응을 모은 대표적인 루마니아 영화다. 
루마니아 수도 부루레슈티의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무대로 1989년 공산체제 붕괴와 민주혁명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블랙코미디다.  75년생인 포룸보이우 감독의 장편데뷔작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200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에게 수여되는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지난해 하반기 미국에서도 개봉돼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었다.

<밀양>의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2007년 칸 영화제에서는 대상인 황금종려상과 국제비평가상 수상작으로 루마니아 크리티앙 문주 감독의 <4달, 3주, 2일>가 선정됐다. 차우셰스쿠 공산정권하에서 원치않는 임신을 한 두 소녀가 낙태를 시도하려는 이틀간의 악몽같은 경험을 탁월한 솜씨로 그려내, 영화제에 참석한 전세계 영화인들을 깜짝놀라게 만들었다. 

문주감독은 68년생이니까, 올해 나이 꼭 마흔이다. 이미 루마니아 내에서는 < 내겐 너무 멋진 나라>로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유명 감독으로, 이 작품을 가지고 지난 2002년 부천국제영화제를 직접 방문한 적도 있다.


역시 2007년 칸 영화제에서는 또하나의 루마니아영화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의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할리우드 배우들도 대거 출연한 이 작품은 구 유고지역 코소보로 향하던 미국 평화유지군들이 루마니아의 한 작은 마을에 뜻하지 않게 발이 묶이면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일들을 다룬 블랙코미디. 

세련된 연출이 돋보이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무엇보다도 루마니아 영화계가 저예산 영화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도 만들어낼 수있음을 보여줬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네메스쿠 감독은 칸 영화제에 이 영화를 출품하기 한해전인 2006년 8월 교통사고로 27세의 아까운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젊은 네메스쿠감독이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물론 세계영화계도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포룸보이우, 문주, 네메스쿠 감독과 함께 기억해야할 또 한명의 루마니아 감독은 바로 크리스티 푸이유이다. 2005년 칸영화제에서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으로 주목할만한 시선 그랑프리를 받았다. 혼자 집에 있던 어느 날 밤, 주인공 라자레스쿠씨는 갑자기 통증을 느낀다. 

앰뷸런스가 달려오고 마침내 병원에 도착한 그는 이 의사, 저 의사 전전하며 진찰을 받는데, 이때부터 슬프고도 웃긴 라자레스쿠씨의 병원 오딧세이가 시작된다. 감독인 크리스티 푸이우에 따르면 이 영화는 루마니아판 ER이라고. 웃다보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마음이 아파지는 사회풍자 코미디다. 올해 마흔 한살인 푸이유 감독은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최근 국제무대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밖에 2007년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단편영화상을 받은 <튜브 위드 햇(Tube with Hat)>의 라두 쥬데,2004년 칸영화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 수상작 <트래픽>의 카탈린 미툴레스쿠(36세) 등도 세계영화계가 주목하는 루마니아의 젊은 영화감독들이다.


루마니아 영화의 이 같은 급성장은 지난 1989년 공산체제의 붕괴와 민주화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커진 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루마니아 영화의 특징으로 리얼리즘, 풍자정신, 신선한 스토링텔링, 솔직 대담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등을 꼽았다. 

한마디로, 풍족하지 못한 경제현실 때문에 비록 저예산 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 대규모 흥행 오락영화들에서는 맛보기 힘든 독특한 개성이 담긴 수작들을 루마니아 영화계가 쏟아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루마니아 정부는 지난 2000년 국립영화센터(CNC)를 창설, 일년이 두차례씩 영화시나리오 컨테스트를 통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내고 있으며, 자국 영화의 제작비 중 약 65%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문주 등 신예감독들은 CNC가 구체제하에서 활동했던 이른바 원로감독 대우에 치우쳐 젊은 세대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는 하다. 


루마니아 영화 전문가인 평론가 안드레이 고르조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와 인터뷰에서 최근의 루마니아영화 부활은 말 그대로 황무지에서 일궈낸 성과라며 , 지난 2000년까지만해도 자국산 영화는 불과 몇편에 불과했던 루마니아가 불과 만 7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핫 (Hot)한 영화 중심지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