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가장 논쟁적인 무신론자로 꼽히는 리처드 도킨스 옥스포드대 교수가 영화 한편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났다. ‘이기적 유전자’‘눈 먼 시계공’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있는 도킨스 교수는 최근 발표한 ‘만들어진 신’에서 창조론과 지적 설계론을 맹렬하게 비판해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도킨스를 분노케한 문제의 영화는 내년 2월 12일 미국 주요극장에서 일제히 개봉될 다큐멘터리 <추방; 허용되지 않은 지성(Expelled ; No Intelligence Allowed)> .
당초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영화로 알고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던 도킨스는 막상 완성된 영화가 창조론과 ‘사촌’격인 지적 설계론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면서, 기존 과학계를 편협되고 억압적이기까지한 조직으로 몰아부치는 내용으로 채워져있음을 알게된 후 경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도킨스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출연한 저명한 과학자들이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 학자들은 제작진이 “악의적으로 의도를 감춘채 (자신들을) 이용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욱 논란의 되고 있는 것은 <추방>의 개봉 시점이다. 내년 2월은 미국 대통령 선거 유세전이 본격화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과학계에서는 이 영화 제작진이 대선시즌에 맞춰 진화론 대 창조론(또는 지적 설계론) 논쟁을 의도적으로 일으킴으로써 보수 대 진보의 대결구도를 부채질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지난달 28일 미국 워싱턴 인근에서 개최된 ‘무신론자 연맹회의’에서 도킨스 교수가 연사로 나서서 “<추방>제작진으로부터 그들이 지적설계론 지지자란 어떤 암시도 사전에 받지 못했다.만약 영화의 일방적인 결론을 알았다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제작진의 부도덕성을 맹렬히 비판했다고 전했다.
그런가하면 도킨스와 함께 영화에 출연한 인류학자 유지니 스콧박사(미국 국립과학교육센터)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과의 최근 인터뷰에서 “제작진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도 나는 이 인터뷰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제작자들은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팔아먹기 위해 미국의 공평주의 가치를 착취했다. 영화가 과학계를 왜곡할까봐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도킨스 교수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추방>제작진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은 것은 지난 봄쯤이다. 제작사는 램팬트 프로덕션. 이때까지만 해도 영화제목은 <추방>이 아니라 <교차로(Crossroads)>였다. 제작진이 밝힌 영화제작의도는 “종교와 과학이 교차하는 접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뜨거운 논쟁을 파헤쳐본다”는 것이었다.
진화론과 무신론을 이야기할 때 첫손꼽는 학자가 도킨스이고 보면, 그에게 일착으로 인터뷰 요청이 간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2006년 BBC 2부작 다큐멘터리 ‘모든 악의 근원은?’을 직접 진행한 적도 있을 정도로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도킨스 등의 예상과 전혀달랐다. 제목도 <교차로>란 중립적 표현대시 <추방>이란 다소 무시무시한 표현으로 바뀌었고, 제작사도 당초 알고있었던 램팬트 필름스에서 프리마이즈 미디어로 교체됐다. 프리마이즈 미디어가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한 영화내용에 따르면, <추방>은 “공립고등학교 , 대학, 연구기관에서 초자연적 지성(지적 설계론)의 존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학자들을 추방한 과학계의 억압적 실상을 드러내는 놀라운 작품”으로 소개돼있다.
영화는 그 증거로 3년전 지적 설계론에 관한 논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리처드 스턴버그, 올해 초 비슷한 이유로 아이오와 대학에서 종신교수직을 거부당한 천체물리학자 기예르모 곤잘레스 등의 사례를 들고 있다. 제작사측은 “램팬트 필름스는 프리마이즈 미디어에 소속된 프로덕션이며 , 제목이 바뀐 것은 마케팅팀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으로 영화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며 , 도킨스 등의 비판을 일축하고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과학계와 종교계의 오랜 ‘진화론 대 창조론(지적 설계론)’싸움이 이제는 학계와 영화계까지 번지고 있다며, 대선을 앞둔 미국 정계와 사회에 이번 논쟁이 어떤 파장을 미치게 될지 주목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