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홀리 헌터 -작은 고추가 맵다

bluefox61 2006. 9. 6. 14:15

로드리고 가르샤 감독의 ’나인 라이브스‘는 미국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마치 종합선물세트같은 영화입니다. 그중 가장 반가운 얼굴은 홀리 헌터(48.사진)였습니다. 지난 2000년 코엔 형제감독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주연으로 나온 작품들을 국내에서 만난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90년대 그토록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화제작들을 쏟아냈던 홀리 헌터도 아마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 ’생사의 고비‘라는 40대 관문을 힘들게 통과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헌터에게는 ’남부 불덩이 (파이어볼)‘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닙니다. 남부 조지아주의 시골농장에서 태어나 성장한 배경때문이기도 하지만 , 157cm 밖에 안되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남부의 햇볕처럼 폭발적인 에너지와 정열로 똘똘 뭉친 연기자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입니다. 

’브로드캐스트 뉴스‘(1987)를 통해 헌터를 만난지도 벌써 19년이나 지났군요. 그 때의 신선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똑똑하고 일 잘하며, 의리있고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데다가, 사랑엔 서툴면서도 이별의 아픔은 씩씩하게 극복할 줄아는 직장여성 캐릭터는 그 당시까지만해도 (아니 요즘도) 상업영화 속에서 매우 드물었거든요. 

콧소리를 섞으면서 말끝을 약간 길게 늘어뜨리는 헌터의 그 독특한 남부식 액센트는 또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렸던지. 얼굴이 나오지 않는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2004)에서 목소리 연기자(엘라스틱걸 역)로 이름이 자막에 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마 헌터의 팬이라면 목소리만 듣고도 단박에 그임을 알았을 겁니다. 

 

말못하는 19세기 여성 아다역의 ’피아노‘(1993)부터 교통사고를 통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 헬렌 역의 ’크래쉬‘(1996)까지, ’애리조나 유괴사건‘(1987)의 여경찰부터 ’야망의 함정‘(1993)의 천박해보이는 여비서에 이르기까지 홀리 헌터는 늘 불덩이처럼 열정적이고 위험하면서도 엉뚱하며 유머러스하고, 외모대신  자신의 ’머리‘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그런 캐릭터였습니다. 

심지어 돈 많고 외로운 상류층 이혼녀로 출연한 ’키스‘( 국내 개봉명은 ’홀리 헌터의 키스‘) 같은 잔잔한 로맨스물에서조차도 그는 소위 사회적 편견따위는 내동댕이치고 중년의 엘리베이터맨과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여성이었지요. 


헌터가  ’피아노‘에서 눈짓과 몸짓만으로 수많은 말과 감정을 표현해냈던 것이 그의 나이 35세 때입니다. 40대, 50대, 아니 60대 헌터의 더깊고 더 섬세한 명연기에 푹 빠져들어갈 만한 그런 영화들이 모쪼록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