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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한없이 깊은 우울

[2046]의 스틸 한장에 눈을 떼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양조위가 한 여자를 안고 있는 사진이죠. 여자는 등을 보인채 남자에게 안겨있습니다. 양조위는 여자의 어깨 넘어 허공을 응시하고 있지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한장의 사진에 양조위의 모든 것이 담겨있지 않은가요. 여자를 가슴에 안은채 이처럼 처절하게 우울한 눈빛을 지닐 수있는 남자가 양조위말고 또 있을까요. 양조위는 자기복제와 쾌락이 넘쳐나는 홍콩 영화계에서 마치 고요한 섬과 같은 존재가 아닐런지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더 깊어지고 여유로워지는 배우가 바로 양조위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할리우드를 거치지 않고도 세계적인 배우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한 중화권 유일의 연기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소하고 평범한 외모의 이 남자의 어디에서 도대..

[내머리속의 지우개]..그리고 알츠하이머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예전 국내외 영화들에서 백혈병과 폐결핵으로 죽어갔던 수많은 미인들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그 시절, 백혈병과 결핵에 걸린 여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새하얀 얼굴에 하늘하늘한 몸매를 지닌 섬세하기 짝이없는 미인이었던지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고통을 참는거라든지 가냘프게 쿨럭쿨럭 기침을 하던 모습이 어찌나 우아해보이던지...솔직히 어린시절 한두번은 흉내까지 내봤던 기억이 나네요.(흐억!) [춘희]를 영화로 리메이크한 [카미유]의 그레타 가르보에서부터 [라스트 콘서트]의 스텔라(배우 이름은 모르겠습니다)까지, 그리고 [선물]의 이영애를 비롯한 숱한 한국의 미인 불치병 환자들까지, 이 계보에 오른 여성은 아마도 수없이 많을 겁니다. [내머리 속의 지우개]는 고..

콜래트럴- 마이클 만을 사랑하는 이유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에게도 지성이 있다면, 마이클 만의 영화엔 지성적 테스토스테론을 끓는다. 그의 영화는 마초적이다. 그러나 마이클 만의 마초에게는 근육이 없다. 대신 그들에게는 일말의 감상이 끼어들 틈이없는 냉철한 현실주의와 일체의 환상을 거부하는 철저한 허무주의가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미국 감독들 중 마이클 만처럼 남성적이면서도 동시에 허무주의적 영화색깔을 가진 이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또한 그만큼 미국 갱스터 누아르 장르를 풍요하게 만들고 새롭게 진화시켜온 감독도 없다. 인기감독의 명성을 안겨준 TV 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부터 [맨헌터]와 [라스트 모히칸]을 거쳐 [히트]와 [인사이더][알리]를 거쳐 최신작 [콜래트럴]에 이르기까지 마이클 만은 거칠고 절망적인 상황에 던져진 한남자의 처절한 ..

[연인], 장예모의 진화 또는 변절?

장예모의 신작 '연인'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역시 스펙터클한 비주얼이다. 당나라 도성의 기방 깊은 곳에서부터 대나무 숲과 억새풀 우거진 들판을 거쳐 광활한 흰눈밭으로 장예모는 관객들을 휘몰고 다니며 현란한 액션과 색깔의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당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사람인 장예모가 작정하고 스타일의 극치를 선보인만큼, 이 영화의 비주얼은 빼어나다. 두 남자주인공의 칼싸움이 낙엽지는 가을에 시작해 눈보라치는 겨울까지 이어지거나, 가을에 죽은(줄만알았던) 메이(장쯔이)가 눈 밭에 파묻혔다가 멀쩡히 기사회생하는 '대륙적 과장(또는 허풍)'마저도 이 영화의 탁월한 비주얼 덕분에 쉽게 잊혀질 정도다. 특히 장예모의 전작 '영웅'이 외국어영화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미국시장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연속 2주..

공포영화팬들께 추천합니다-[쓰리몬스터][알포인트]

[쓰리 몬스터]와 [알 포인트]는 최근 개봉된 한국영화([쓰리몬스터]는 한,일,홍콩합작)들 중 단연 돋보이는 수작들이다. 공포 코드를 갖고 있는 두 작품은, 단순히 소재로서의 공포를 벗어나 인간존재의 핵심을 파고드는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분열적 자아의 공포(쓰리 몬스터 중 박찬욱 편 '컷')와 전쟁의 공포(알포인트)를 파헤친 시도가 돋보인다. [쓰리 몬스터]의 '컷' 는 한 천재 영화감독에 닥친 하룻밤의 악몽에 관한 이야기이다. 능력있고 착하며, 게다가 부자이고 인형같은 마누라까지 있는 영화감독 류지호(이병헌)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괴한의 요구는 피아노 줄에 마리오네트마냥 매달린 아내의 손가락이 5분마다 잘려나가는 것..

토비 매과이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곰곰히(?) 생각해보면,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의 기준은 69년생이 마지노선인 것 같습니다. 제 나이 많은 건 모르고, 69년 이하는 ″아직 인간될라면 멀었다..″라고 맘대로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제 친구들이 저보고 30세 넘어서야 그래도 쬐금 인간이 됐다고 그러더군요...) 어쨋든 , 20대 배우 중에서는 자신있게 '좋다'고 할만한 얼굴이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멋진 외모와는 별도로 인간적인 끌림, 아우라를 느끼게하는 배우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편견'을 깨트린 한 남자 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토비 매과이어입니다. 이안 감독의 97년작 [아이스 스톰]에서 그를 맨 처음 봤을 때, ″참 묘한 분위기의 젊은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제이크 길렌할과 비슷했다고 할까요. 이 영화에..

내 남자의 로맨스, 아는 여자, 인어공주... 여름에 본 몇편의 영화

여름을 타는가 봅니다. 영화보기를 그리 게을리한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글쓰기에는 한없이 게을러지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최근 본 몇편의 영화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내 남자의 로맨스] 웬만해서는 영화보다가 중간에 나온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나쁜 영화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얼마나 나쁜지를 확인해볼 수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만큼은 끝까지 앉아서 보는데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모 일간지 기자는 이 영화를 만든 박제현 ( 울랄라 시스터스, 단적비연수)감독의 메이 필름이 '한국의 워킹 타이틀'을 지향하는 것같다고 하더군요. 영화를 보고나서, 상찬도 이런 상찬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지적이 나오게 됐는지는 알겠더군요. 7년 사귄 커플 사이에 어느날 ..

이란 영화의 또다른 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할리우드 대형 오락물, 가벼운 연애담과 코미디 등이 점령한 여름시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자 기쁨이다. 쿠르드계 이란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며 감동이 될 수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부모가 죽은뒤 가장이 되어버린 12살난 소년 아윱이 누나와 어린 여동생, 그리고 장애자인 남동생들과 생존해나가기 위해 악전고투하면서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아윱은 6.25전쟁 후 지지리도 가난했던, 가족을 위해 희생을 묵묵히 감내해내야 했던 우리 부모세대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이 땅 어디에선가 아직도 수많은 소년소녀가장들이 아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 영화는 인생경험의 폭과는 무관하게 관객의 마음을 ..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를 말한다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화씨 9/11]을 드디어 보게됐습니다. 부시 정권과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을 낱낱이 까발긴 내용이야 다들 많이 아실테지요. 개인적으로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소위 주류언론의 한계성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마도, 대다수 미국인 관객들 역시 이 영화에 등장한 갖가지 팩트들을 (예를 들어 부시 친구들이 어떻게 행정부의 요직을 잠식했는지, 빈라덴 가문과 부시 집안의 유대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이라크 전쟁에 나간 미군 병사들이 진짜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등) 소위 3대 네트워크라고 하는 주류 언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받아서 재가공하는 한국의 외신 기사들은 어떻겠습니다. 이른바 주류언론들이 '불편부당성'또는 '중..

[더 블루스]-빔 벤더스의 세번째 음악편지

빔 벤더스의 영화에서 음악은 제 2의 주인공이다. 전후 미국 대중음악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벤더스는 언제나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음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해냈다. 그의 대표작 ‘파리 텍사스’는 황량한 이미지와 함께 라이 쿠더의 흐느끼는 듯한 기타 선율로 기억되며, ‘밀리언 달러 호텔’은 그로테스크한 인간군상만큼이나 보노의 노래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더 블루스-소울 오브 맨’은 벤더스의 이른바 ‘음악 영화 3부작’ 중 세번째 작품이다.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쿠바 음악의 거장들을 불러냈던 그는 두번째 음악영화 ‘비엘 파시에르트’에서는 동독출신의 포크록그룹 BAP를 통해 분단사의 비극을 짚어냈다. ‘더 블루스…’는 이미 오래전 사망해 전설인 된 미국 블루스 음악가 3인을 다루고 있다.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