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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비극을 다시 생각한다

1972년 9월 5일 새벽 4시 30분. 독일 뮌헨 올림픽 선수촌은 깊고 평화로운 잠에 빠져 있었다. 선수촌을 둘러싸고 있는 2m 높이의 철조망 담장의 한 곳에서 그때 약간의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밤새 선수촌 밖 유흥가에서 놀다 돌아온 미국 선수 몇 명이 월장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 그들은 담을 넘으려는 순간 자신들처럼 선수촌에 몰래 들어가려던 젊은이 8명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얼굴 생김이나 인종을 구별하기는 어려웠지만, 다른 나라 소속 선수들인 것 같았다. 몇 사람은 어깨에 묵직한 더플백을 메고 있었다. 미국 선수들은 이들의 월장을 도와준 뒤 잘 자라는 인사까지 해주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8명은 사전에 위치를 파악해놓은 이스라엘 선수들의 아파트 숙소로 접근했다. 이들은 더플백에서 기관총을..

클림트

오스트리아 빈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화가 클림트(존 말코비치)의 병실로 에곤 쉴레(니콜라이 킨스키)가 찾아온다. 한때 ‘빈의 난봉꾼’으로 불리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화가 클림트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삶과 죽음의 보잘 것없는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그는 에곤 쉴레의 병문안을 계기로, 논리도 이성도 없는 무의식과 과거의 세계 속을 헤매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은 과거로 되돌아가, 세기말의 퇴폐와 흥분이 공기를 짓누르고 있던 1900년. 오스트리아에서 퇴폐화가로 온갖 비난에 시달렸던 클림트는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선 열렬한 호평과 찬사를 한몸에 받는 화가가 된다. 축하파티에서 그는 프랑스 댄서이자 영화배우인 레아를 소개받게 되고, 그녀에 대한 열정에 휩싸여 현실과 꿈을 오가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

토고를 다시 생각한다

지난해 월드컵 조추첨에서 한국대표팀의 첫 상대국으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토고가 선정됐을 당시, 주변의 공통된 반응은 “토고가 도대체 어떤 나라냐”는 것이었다. 수년동안 국제부 기자로 일해온 필자에게도 토고란 국명은 낯설었다. 토고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국내 언론사상 최초로 지난해 토고를 현지취재했던 문화일보 기사와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곳의 아이들이었다. 옷차림은 비록 허름해도 잘 닦아놓은 검은색 보석처럼 반짝이던 아이들의 눈망울과, 축구공을 들고 환하게 웃던 얼굴표정에서 축구를 통해 희망을 찾고 있는 토고국민들의 고달픔과 희망이 동시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하면 으레 끔찍한 종족분쟁과 소년병, 기아와 에이즈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검은 얼굴들을 떠올렸..

존 말코비치 -나도 그의 뇌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스파이크 존스의 2000년작 '존 말코비치 되기'에는 배우 말코비치(53.사진)의 머릿 속 안에 들어갈 수있는 통로가 등장합니다. 어둡고 습기찬 터널을 빠른 속도로 지나면 , 드디어 15분동안 말코비치의 뇌 속에 머물 수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통로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저 역시 한번쯤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습니다. 스크린에서 보듯 그는 진짜 사악한 심성을 가진 남자일까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 많은 영화에서 악의 화신같은 캐릭터를 어떻게 그토록 생생하게 연기할수 있을까요. 그의 가공할 연기력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연기하지 않을 때 그의 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착하고 순한 눈빛의 배우보다는 어둠과 빛의..

왜 제인 오스틴인가

"우리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오스틴이 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커렌 조이 파울러의 ‘제인 오스틴 북클럽’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제인 오스틴의 책을 함께 읽고 토론을 벌이는 독서클럽의 멤버인 조슬린에게 있어 오스틴은 결혼하지 않고도 사랑과 구혼에 대한 멋진 소설을 쓴 여자다. 또 다른 멤버 버나데트에게 있어 오스틴은 희극의 천재다. 실비아의 딸이자 동성애자인 알레그라에게 오스틴의 존재는 여성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경제적인 궁핍함이 가져오는 충격에 대한 글을 쓴 여자이며, 프루디란 여자에게 있어 오스틴은 겨우 마흔한 살의 나이에 호지킨병(림프계 암)으로 죽은 여자다. ‘제인 오스틴 북클럽’은 여섯 멤버들의 삶과 오스틴 소설 속 캐릭터 또는 오스틴 자신의 삶(독신, 병, 죽음, 또는 사후 끊임없이 제기됐..

너무 농염한..스칼렛 요한손

성숙함이 반드시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스칼렛 요한슨을 보면 실감할 수있다. 이제 스믈두살밖에 되지 않은 이 여배우의 차분하고 깊은 눈빛은 나이를 잊게 만들정도로 경이롭다.동세대 배우인 키라 나이틀리나 린제이 로한, 나탈리 포트만, 시에나 밀러 등과 요한슨은 확연히 구별된다. 외모부터 그렇다. 요한슨은 인형같은 깜찍한 외모의 소유자도, 멋진 옷차림으로 유행을 선도하는 패셔니스타도 아니다. 몸매도 로한처럼 깡마르거나, 나이틀리 처럼 큰키에 늘씬하기보다는 아담하고 풍만한 편이다. 요한슨은 21세기 신세대답지않게 로렌 바콜이나 리타 헤이워드같은 40~50년대 할리우드 전성기때 ‘디바’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를 가졌다. 요한슨의 특별함은 조숙함을 넘어 성숙한 눈매와 농염한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

쿨 가이, 조지 클루니

미국 영화계에서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로 활동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던 로버트 레드포드, 와 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의 워렌 비티 등이 대표적인 감독 및 제작자 겸업 배우들. 비록 아카데미 상은 받지 못했지만 조디 포스터, 드류 배리모어 등도 할리우드의 파워 여성들로 꼽힌다. 그러나 조지 클루니의 경우는 좀 특별하다. 할리우드를 비롯해 세계 영화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스타배우로서 그의 독특한 행보 때문이다. 블록버스터 오락물이 사실상 지배하는 할리우드에서 클루니는 진보적인 정치메시지 영화의 부활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할리우드의 진보주의자, 즉 80년대 초반 를 만들었던 워렌 비티, 그리고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그린 를 제작하는 등 인디영화의 대..

밴디다스

서부개척시대.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멕시코로 돌아온 우아한 미녀 사라 (셀마 헤이엑)와 거친 성격의 하층계급 여성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는 출신배경만큼이나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상대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않지만, 우연한 일로 인해 손을 잡게 된다. 철도건설을 위해 무자비하게 멕시코 농민들을 수탈하는 미국은행에 의해 사라는 아버지를, 마리아는 생명처럼 소중한 농토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라와 마리아는 가족을 위해, 나아가 멕시코의 힘없는 민중들을 위해 미국은행을 털기로 하고, 2인조 미녀은행강도로 나선다. 프랑스의 스필버그로 불리는 뤽 베송이 제작을 맡은는 볼거리와 속도감있는 액션에 무게를 둔 작품이란 점에서 , 베송이 그간 할리우드와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내놓았던 일련의 영어영화..

하프라이트

레이첼 칼슨 (데미 무어)은 ‘황금단도상’ 등 저명한 추리문학상을 휩쓴 미국 여성작가다. 영화가 시작되면 레이첼이 런던의 아담한 자택서재에 앉아 구식 타이프라이터로 작품을 쓰고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영국인 남편이 편지 한장을 들고 서재로 들어온다. 그는 영국 출판계가 알아주는 실력있는 편집자이지만, 스릴러 작가로는 영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방금 읽은 편지도 스릴러 소설의 출판을 거절하는 내용이었다. 레이첼은 실망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은 좋은 작가야. 하지만 출판사측에서 스릴감이 좀 부족하다고 하니깐 조금 보완해서 다시 보내보는게 어때.” 만약 레이철의 남편이 쓴 소설이 이 영화의 원작 였다면, 출판사측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스릴감이 부족한데다가, 엉성하기 ..

종로코아극장의 폐관을 아쉬워하며...

80,90년대 영화광세대에게 종로 2가의 코아극장은 특별한 추억이 서려있는 곳일겁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동사서독' 등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코아극장이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류승완이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기쁨을 안겨주었던 곳도 코아극장이었습니다. 영화뿐이겠습니까. 코아극장 앞은 종로서적과 함께 우리들의 단골 약속장소였고, 돈 좀 있는 날에는 반줄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을 즐기는 호기를 부렸는가하면, 호주머니가 가벼운 날은 오뎅과 떡볶이 한 접시를 친구들과 뚝딱 먹어치우며 수다를 떨었던 곳도 코아극장 주변에서였죠. 특히나 코아극장은 저같은 '프랑스 문화원'세대에겐 문화원 지하극장의 매케한 곰팡내를 추억할 수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스크린이 작아도, 좌석이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