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870

‘카포티’ 그리고 ‘인 콜드 블러드’

1984년 8월 28일.뉴욕타임스 부고란에 한 남자의 사망을 알리는 장문의 부음 기사가 실렸다. 부고는 이렇게 시작된다. “트루만 카포티. 명징하게 빛나는 탁월한 문장으로 전후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59세 나이로 어제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졌다. 카포티는 소설가이자 단편작가이며, 로 논픽션 소설 장르를 개척한 문단의 셀레브리티(유명인사)였다. 십대 시절 첫 단편소설 으로 데뷔한 이래 그는 총 13권의 작품집을 남겼으나, 진정으로 위대한 미국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오랜 친구인 존 말콤 브리닌에 따르면, 카포티는 명성과 부(富), 그리고 쾌락을 좇는 데 자신의 시간과 재능, 건강을 탕진했다.” 국내 영화팬들에게 트루만 카포티란 이름은 주로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의..

오프사이드

월드컵 본선진출을 결정짓는 이란과 바레인의 마지막 경기. 이란 수도 테헤란은 이날 경기를 앞두고 축구열기에 후끈 달아 올라있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마다 대형 이란 국기를 휘두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다. 버스 한쪽 구석에 축구광 십대 소녀 미리엄도 앉아있다. 남자 옷을 입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이란 법에 따르면 여성의 축구장 입장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재수가 좋으면 경기를 구경할 수 있지만, 경기장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찰 군인들의 눈에 뜨이면 바로 퇴장조치를 당하거나 풍기문란 죄로 체포될 것이 분명하다. 일단 입장권을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 아무리 남장을 했어도 어쩔 수 없이 여자티가 나기 때문에 정식의 매표소에서 표를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암..

이마무라 쇼헤이의 죽음을 추모하며

지난 2001년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해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다. (1983) (1997)로 두 차례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본 거장 감독과의 만남에 기자회견장은 시작 전부터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마무라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부대행사인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에 신작 를 내놓고 전체 제작비 중 약 4억 엔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온 참이었다. 1926년생이니 당시 그의 나이 75세. 나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거동부터 얼굴색, 언어구사 능력 등에 이르기까지 이마무라의 건강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1시간 남짓한 길지않은 기자회견 내내 그는 힘에 부친듯 기자들이 퍼붓는 질문에 짧게 대답했고, 그나마도 종종 질문의 방향과 어긋나곤 했다. 영화제작과 관련..

'굿나잇 앤 굿럭', 머로, 그리고 부시를 생각한다

유럽대륙이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던 시절, 대서양 건너 미국사람들이 유럽의 최신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라디오였다. 유럽에 가족이나 친척을 남겨둔 이민자들은 더욱 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과 위로는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CBS 런던특파원 에드워드 머로(1908~65)의 목소리뿐이었다. “여기는 런던입니다”로 시작해 “안녕히 계십시오, 행운을 빕니다(굿 나잇 앤 굿 럭)”으로 끝나는 그의 생생하고도 차분한 리포팅은 20세기 방송 저널리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본래 ‘굿 나잇 앤 굿 럭’은 머로가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1940년 말, 매일 밤낮으로 런던에 독일군의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던 이른바 ‘런던 블리츠’ 때 엘리자베스 공주(현 여왕 엘리..

아이가 나오는 공포영화가 더 무섭다 1

공포영화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대부분 사이코 살인마, 귀신 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악마 등이다. 예외적인 존재가 바로 어린이. 처럼 어린이가 살인마이거나 악령으로 등장하는 공포영화들이 적지 않다.뉴스위크지는 최근 기사에서 흔히 ‘천사’의 이미지로 인식돼온 어린이가 영화 속에서 절대 악으로 등장할 때 관객은 더 강한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면서, 을 비롯해 등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공포영화들이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영화 속 어린이 악마는 부모-자식 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혈연관계의 해체, 그리고 인류사회의 뿌리깊은 신뢰기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이가 악의 존재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공포영화들을 소개한다. 1956년, 윌리엄 마치 감독영국에..

사우디에도 영화문화 싹튼다

가족이외에는 여성의 얼굴을 볼수 없으며, 여배우가 한명도 없고,전국에 영화관이 한 곳도 존재하지 않으며, 대중문화란 것이 사실상 부재한 나라에서 과연 영화문화가 싹틀 수있을까. 전세계에서 여성인권이 가장 억압받고 있는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금 ‘대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사상 최초로 장편상업영화가 만들어져 올 여름 개봉을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화제의 작품은 ‘케이프 알 할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이슬람권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기로 악명높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화란 점뿐만 아니라 보수와 진보 , 신구세대의 갈등 등 사우디 내부의 갈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영화에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이 최근 보도했다. 그동안 사우디에서는 정부의 억압을 ..

데이비드 스트래선- 뒤늦게 발견한 보석

조지 클루니 감독의 '굿나잇 앤 굿 럭'은 제게 데이비드 스트래선(57)이란 배우를 발견하는 기쁨을 알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1950년대에 매카시즘과 맞서 싸웠던 방송인 에드워드 머로 역을 맡은 스트래선은 몸에 딱맞는 옷을 입은 듯, 연기가 아니라 머로 그 자체이더군요. 저널리즘 역사를 조금 읽어본 사람이라면 머로란 인물이 얼마나 전설적인 방송인인지 아실겁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CBS 라디오의 런던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유럽전선 뉴스를 매일 대서양 건너 미국 가정에 전달했던 사람이 바로 머로이지요. 전쟁이후에는 심층기획보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매카시 의원 등 숱한 권력층과 사회비리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실물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여린 듯하면서 강인한 눈매, 그리고 생방송 중에도 담..

유하의 '비열한 거리'

갱스터 혹은 조직폭력배를 영화 속에서 다루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식이고, 또하나는 마틴 스코세즈식이다. 코폴라식은 ‘대부’로 대표되는 비장미가 특징이다. 여기에서 조폭은 폭력과 불법을 일삼는 범죄자들이지만, 보통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와 우직함, 그리고 의리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남성성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비열한 거리‘ ’ 좋은 친구들‘로 대표되는 스코세즈의 조폭영화에서는 코폴라가 ’대부‘에서 창조한 고상하고 과묵한 남성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상스럽고 수다스러우며, 감정기복이 심하고 작은 이익에 배신하는 주변부 인간들뿐이다. 두가지 유형에 하나를 더한다면, ’저수지의 개들‘과 ’킬빌‘로 대표되는 퀜틴 타란티노를 들 수 있겠다. 그의 조폭영화는 ..

스티븐 매퀸 ..그의 마지막 꿈

미국의 걸출한 액션스타 스티브 맥퀸이 1980년 5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는 등 30여편의 영화와 두 자녀 채드, 딸 테리 그리고 또하나의 소중한 유물을 이 세상에 남겼다.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가 애지중지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손때가 묻은 가죽 장정의 노트 16권이었다. 그러나 맥퀸이 사망한 이후 이 노트들은 무려 15년동안이나 두개의 트렁크에 담겨져 말리부에 있는 맥퀸의 자택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채 세상으로부터 잊혀졌다. 10여년전, 맥퀸의 아들 채드는 집 창고를 청소하다가 낡은 트렁크 두개를 우연히 발견하게 됐고, 그 안에 들어있는 노트들이 무엇인지를 알게된 후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직접 쓰고 기록한 역사액션영화 의 시놉시즈와 자료, 사진, 스케치, 시 등이 바로 16권의 ..

<티켓>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가 있다. 은 으로 국내에 잘알려진 이탈리아 거장 감독 에르마노 올미,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리고 영국의 사회파 감독 켄 로치가 만든 옴니버스 영화다.세사람이 각각 카메라를 들고 이탈리아 로마행 유럽 횡단기차에 올라탔다. 이들은 1등칸부터 3등칸에 이르기까지, 기차의 구석구석을 관찰하면서 여러 인생을 이야기한다.기차란 디지털이 지배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묘하게도 아직까지 인간적인 온기가 남아있는 아날로그의 공간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부딛히게 된다는 점에서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있다.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올미감독은 손자의 생일파티에 가기 위해 1등칸에 올라탄 노신사의 마음속 여행을 뒤좇는다. 그는 막 헤어진 여성의 친절..